배정훈 시단 ---여 름 배 정 훈 마을이 고요하다.다람쥐 앵두를 물고서 숨바꼭질 하는 저녁하우스마다 고추가 영글어가고아버지 땀방울에 옥수수 키가 자란다.벌들은 향기를 나르고소들은 소꼴에 머리를 들이밀고 하모니카를 분다.계곡 물소리 졸졸졸가로등마다 나방들이 모여들고하늘엔 어스름 별들이 꽃을 피운다.◆배정훈 작가 약력- 국립안동대학교 국문과 졸.시집
풍경한참 가문비에잠도 가물다.토끼잠 자다창문 밖에서 머뭇대는새벽 공기를 만지다 보면내가 한 아이의 울타리가 되었다고말하기가 쑥스럽다.그런 데면데면한 밤이 내려쌓이면아침엔 매미 울겠지.올 여름 장마는 올 듯 말 듯약이 잔뜩 올라살구는 달게 익고수국도 능소화도 한 철 신이 나는데여름 풍경 속넘어지고 또혼자 일어서려는두돌박이 가시내가잘방잘방 따라온다.세월을 걷는
배정훈 시단 --- 별 배정훈 인생버스여름이다.막바지 뻐꾸기 소리에선글라스 챙겨 쓴 버스 아저씨.이렇게 장날은 시작된다.맨 앞좌석에 앉아늙음을 훔쳐보는 젊음이여.곧 뒤곁에서 튀어나올노친의 냄새를 막을 순 없겠지.세월이란 그런 것.깍듯이 찾아와서붙들어도 애원해도차버리고 내달리는올 사람 오고 갈 사람 가는그 모든 것이정류장만큼 익숙하지만땀냄새 지린내 생선비린내
배정훈 시단 ---별...(11) 고모가 돌아가신 밤에 별을 센다.고모가 돌아가신 동네에 그래, 나도 태어났구나.이제야 알았구나, 새벽에 이렇게 별이 많다는 것을.나도 감사하구나 생명이, 살아있음이.말을 쓰는구나, 시를 쓰는구나.별을 쓰는구나.두근대는구나.◆배정훈 작가 약력 - 국립안동대학교 국문과 졸.시집 ⇨2013
배정훈 시단 --- 상경(上京) 배 정 훈산 능선을 따라노을이 빛날 때동쪽 하늘에 손톱달이 떳다.가을이 서걱서걱 밟히고내 구두의 굽은 낮아졌다.낙엽 바스러지는 소리 들릴 때이것이 나이 드는 것이구나 하며영주 버스터미널 귀퉁이에 앉아강남 가는 길 여무는 것을 바라본다.악어 이빨 가튼 청춘의 갈림길이제 각각 모퉁이를 찾아드는도시의 밀림은 신비롭다.가지런한 아파
배정훈 시단 --- 이른 아침 배 정 훈속 알뜰한 여름 무 싣고고물트럭은 36번국도 휘돌아가7번 국도와 마주한 후포장에 다다른다.일찍이 자리를 잘도 잡았다.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장.흥정이야 늘 속 시끄런 일이지만오랜만에 제대로 선 장터 하늘에갈매기가 난다.소낙비 한 차례 올 모양새다.바다 바람 푸른데작은 무 하나 잡아들고후미진 시비를 걸어대는진상도 있더라만오
배정훈 시단 --- 아버지를 기다리며 배 정 훈 아버지가 늦는 날에는달이 밝았다.어린 나를 깨워얼굴을 부비시던 아버지아직도 나는 그 감촉을 기억한다.이제 스무살 넘어대학까지 간 나는아버지가 늦는 어떤 날엔아버지가 달처럼 기울어달빛처럼 누워 계실까 두려워하루 보름 한달을 저울에 매달고아버지 나이에서 내 나이를 빼어보고아버지의 살날을 의심한다.많이도 빼어먹고
배정훈 시단 --- 가을타리 배 정 훈 홍시가 물르던 계절입니다.감빛이 풍년이던 계절입니다.그래도 사람들은 을씨년스러옷깃을 곧추세우던 계절입니다.산에 불 놓기가 무섭게번져가는 낙엽이 행여 다칠까이리저리 비껴 걷던 계절입니다.그러다 마주하면 눈물 왈칵 쏟던먹먹한 계절숫자를 셈하고 셈하여도한숨이 해답이던 계절입니다.이 계절이 오면달력을 보며찬 밤이슬을 맞으며달
늦은 밤엄마의 마른기침 소리나는 거실에 몰래 불을 밝히고약통에서 용각산을 찾는다.귀에 거슬리는 것이다.어제가 소설(小雪)일진데지리한 가을장마에 지쳐눈이나 옴팡지게 내렸으면 하는거칠고 굽은 마음책임의 모퉁이에 들어선 나는효자손보다 내 손끝이 야물다는그 말 한마디에엄마를 쉬이 밀어내지 못한다.가난한 십남매의 맏며느리사연 많은 농군의 아내그래도 환갑 지난 아버지
배정훈 시단 --- 야상(夜商) 배 정 훈가슴이 먹먹한 밤잠도 오지 않는 밤지나간 오늘을 되새김질 하며욕심이 지나치다고혼잣말을 한다.인생을 운전하기에너는 너무나 우유부단하다고지나가던 트럭이 클락션을 흘긴다.인생을 운전하기에풀밭의 꽃들이 너무 많아밟아야할 꽃들과 꺾어야할 꽃들과피지 못할 사연들이 너무 많아모든 게 가뭇하고 가뭇한데하늘에 별은 청청하고잠은 멀어
배정훈 시단 ---등굣길 배 정 훈 아이 손잡고 유치원 가는 길말을 배워가는 아이에게새 말을 다듬어주는 것은나 아닌 계절이 품은 온기여라내 검지를 꼭 쥔 아이처럼야무지게 움트는 봄아이 손을 놓고서나는 중얼거린다.“다 이루었도다.” ◆배정훈 작가 약력 - 국립안동대학교 국문과 졸.시집 ⇨2013년
배정훈 시단 --- 배정훈 추석(秋夕)무엇이든누구이든넙죽 절하는 계절이찾아들었다.누런 빛 스며들며벼는 조아리고달마저 배가 찼는데고마워하지 않는다면그 어찌 세상일쏘냐.으레 그렇듯이웃집 너머동무를 찾게 되는그림움과 마주하며 히죽이면짙어지는 주름이머뭇거리다 떠난다.바람 닿는 곳 모두가시간을 비켜 움츠리는 계절일진데웃기도 함박이라시간의 포화(飽和)여그 곁으로풍진
배정훈 시단 ---삯경기가 안 좋다고들 한다.최저임금에 높은실업률배부른 폭염 속에도장날을 빼곡히 채운 할매들그 분들은딱 그 물건의 삯을 요구한다.더도 덜도가 맞붙는흥정도 사절이다.굽어진 어깨 위로 피어난몸빼의 꽃밭을 거닐다 보면손사래 치선 손님도아차하며 순해진다.신기한 일이다요리법을 모른다고 돌아설 찰나검색창 보다 스피드하게 알려주니신기한 일이다. 부지런히
제 비 배정훈 1996년 겨울동해로 야반도주 했던 밤새벽 아버지 손 가득 검은 봉다리묵호항 알배기가 꼴똑찬청어가 가득 들어있었다.오천원에 열다섯 마리부산에선 한 번도 맛보지 못한청어.급히 얻은 월셋방일주일 내내 청어만 먹었더랬다.그 맘 때 청어는 풍어라그 많던 가시를 바르며 먹던청어알의 매끄러움을나는 잊지 못한다.그리고 그 청어알이아버지 굳어진 눈물인 것도
배정훈 시단 제비세상 앞서 간다고 욕하지 마라그들은 단지 형상일 뿐낡은 시멘트 집 처마 끝조그만 제비집언젠가 버려두고 떠날 것인데공들여 공들여알을 깨고 나올 햇것들에게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나르는제비에게왜냐고 묻지마라.품안의 자식이라뜻없는 공덕이라계산할 수 없는 수학이라.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물끄러미 보고 있자니멀리서 나를 부르는 풍경소리 들린다. ◆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