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임하연가 없는 무한 허공 젓고 저어 지친 나래구하는 바 무엇이냐 바람 속을 나는 백로이제 그만 둥지나려 따뜻하게 쉬어보렴 둥지 속이 따뜻한가 허공 속이 고달픈가백골이 진토 돼도 허공 속을 날고 날아자유인가 구도인가 산산이 부서졌네 그림 : 박유순 (화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한다고 아내가 투정이다. 언제부턴가 새벽 6시면 눈이 떠져서 혼자 부스럭거리다가 안방에서 쫓겨나기 일쑤다.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서 TV를 켜고 이리저리 두어 번 채널을 돌리면 어김없이 걸려든다. “나는 자연인이다” 비닐인지 천막인지 온통 시커먼 거죽을 덮어쓴 움막이 등장하고, 공사판에서 주워
제 비 배정훈 1996년 겨울동해로 야반도주 했던 밤새벽 아버지 손 가득 검은 봉다리묵호항 알배기가 꼴똑찬청어가 가득 들어있었다.오천원에 열다섯 마리부산에선 한 번도 맛보지 못한청어.급히 얻은 월셋방일주일 내내 청어만 먹었더랬다.그 맘 때 청어는 풍어라그 많던 가시를 바르며 먹던청어알의 매끄러움을나는 잊지 못한다.그리고 그 청어알이아버지 굳어진 눈물인 것도
36번국도 새도로 완공시점에 맞춰‘제1회 죽변항 울진수산물축제’ 구상 울진을 대표하는 두 개의 항이 있다. 후포항과 죽변항, 울진사람들은 이 두 개의 항포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아직도 그 항구들은 어린시절 가족들과 친구들과 행복했던 애달팠던 생생한 정경이 현재 진행형으로 다가온다.사람들은 이래서 고향을 어머니에 비유하고,
음식 맛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겐 물회가 그렇다. 내가 교직으로 처음 발령받았던 곳이 조그만 포구가 있는 바닷가 ㅅ초등학교였다. 당시는 경북 동해안의 주요 항구였던 죽변, 후포 등 물론 조그만 어촌마다엔 꽁치,오징어,쥐치,대게 등 해산물이 풍성하게 잡히던 때였다. 좀 뻥을 친다면 쥐치가 하도 많이 잡혀 그물이 그 무게를 감
요즘은 건축방식이 다양하고 누구나 건축기술을 쉽게 배울 수도 있지만, 불과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건축기술자는 매우 귀했다. 특히 한옥양식의 전통 건축물을 짓는 목수는 매우 귀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술이 뛰어난 목수를 대목수, 또는 대목장이라 했다.그래서 중요하고 큰 건축 공사는 대개 대목장의 감각과 노하우에 의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울진 출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지도자가 만나서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의 시대를 열자고 천명했던 판문점 선언이 발표된 지 1년이 지나고 있다.한반도에서 분열과 적대의 70년을 뒤로하고, 남과 북 두 나라 사이에 항구적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열리게 될 지 모든 국민과 세계인들도 지켜보고 있다.지난 하노이 북미 회담이 결렬되고, 북한의 비핵화가 제대로 이루
우리나라 건강보험이라고 하면, 항상 ‘세계가 부러워하는’ 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1977년, 제도 도입 당시 건강보험(의료보험)은 국민의 8.2%만을 대상으로 하는 초라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장은 돋보였다. 1989년 전국민을 가입자로 하는 전국민 의료보장을 달성하였다. 12년만에 이룬 쾌거였다.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다면,
아이가 걸음을 배워 우리라는 공동체로 첫 발을 내딛는 공식적인 행사가 돌이며, 돌잔치가 벌어지는 마당은 동네 사람들과 첫 안면을 트는 곳이다. 한국인이 가지는 ‘우리’ 라는 개념은 마당에서부터 싹튼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한국인들은 자기(自己) 를 ‘저’, ‘나 (
내가 속해있는 어떤 모임에서 가족들과 함께 경주에 답사를 하기로 했다. ‘고리타분한 역사쟁이’로 불리는 내가 인솔자겸 해설자로 지목되었고, ‘여행’이란 단어가 그렇듯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들떠서 이런저런 제안들이 난무했다. 경주의 온갖 문화재와 명승고적이 오르내리고 마침내 한 사람의 입에서 성(性) 박물관도 가
딸과 함께 한 유럽 배낭여행 중에 절실히...팔순의 슬로베니아 할머니로부터 응원받아아들이 몇 년 전에 군대가면서 가족사진 한 장 달라고 했다. 가족이 제일 그리울 거라며. 연고도 없는 울진으로 귀농하여 네 가족이 한 잉크물에 풀어 살았으니 왜 안그렇겠는지...난 손바닥만한 가족사진 뒷면에 이 글귀를 한 자 한 자 박아 주었다. “금이라 해서 모두
널리 대중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대중음악 또는 가요라고 정의 한다면, 우리나라의 대중가요는 일제 강점기 경성방송국 개설과 함께 보급되면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다. 우리나라 최초 대중가요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의 를 그 효시로 보고 있다. 당시에는 『창� 뻑箚� 했다. 이 곡은 외국곡인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으로
배정훈 시단 제비세상 앞서 간다고 욕하지 마라그들은 단지 형상일 뿐낡은 시멘트 집 처마 끝조그만 제비집언젠가 버려두고 떠날 것인데공들여 공들여알을 깨고 나올 햇것들에게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나르는제비에게왜냐고 묻지마라.품안의 자식이라뜻없는 공덕이라계산할 수 없는 수학이라.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물끄러미 보고 있자니멀리서 나를 부르는 풍경소리 들린다. ◆배정
매일같이 하던 관악산 둘레길 산책을 열흘째 못하고 있다. 지난해 겨울부터 눈 한 번 제대로 내린 적이 없는 중부지역에 봄 가뭄이 계속되는 바람에, 산책로 흙길이 메말라 먼지투성이로 변했기 때문이다. 도시 둘레길인 만큼 평소에도 사람의 발길이 잦아 흙먼지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숫제 땅을 밟기가 무서울 정도로 풀썩거린다. 당장 비가 오더라도 웬만한 양으로는
블타바강의 카를교신부 동상 만지며 기도하면 소원 성취팔자에 없이 커다랗게 만든 나의 산골 꽃밭은 지금 보라보라하다. 이전에는 꽃잔디, 진달래, 벚꽃, 복사꽃, 서부해당화, 금낭화로 이어지며 핑크색 일색이더니 지금은 미스김 라일락, 매발톱꽃, 붓꽃 등 보라색 꽃들이 어깨동무하며 피어나고 있다.향기로 발길을 멈추게 하는 꽃이 있는가
벌써 반세기도 더 지난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싶다. 담임이었던 남주종 선생님과 우리 꼬맹이들은 학교 뒷마을 오릉갈(현 노음2리) 당두를 지나 성류산에 올랐다. 중턱쯤 이르러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모이게 하곤 우리에게 우리 학교인 노음초등학교, 근남면사무소와 경찰지서, 수산다리, 망양정, 비행장 등을 찾아보게 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성류산 중턱에 오르느라
아이들은 아플 때, 배고플 때, 불편할 때,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소리 지르며 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슬플 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억누르고 자기조절을 못하게 될까봐 참는다. 과연 슬픔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일까? 슬픔과 눈물이 기쁨보다 더 큰 위로가 될 때도 있다.행복했던 기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추억이 어쩌면 슬픔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주자는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한 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했고, 불가(佛家)에서는 작은 악(惡)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듯, 작은 악이 쌓여서 큰 죄악이 된다. 작은 선(善)이라 하여 가벼이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모여서 항아리를 채우듯, 조금씩 쌓은 선이 큰 선을 이룬다는
노년 후회 임하연 새끼제비 입 벌리며 어미 기척 환호하고 까막새도 먹이 물어 어미 봉양 효심 정성 무상하게 세월 가면 부모·자식 정도 쇨까 젊은 가족 노는 뒷전 백발 아래 새는 한숨 맹목적인 내리사랑 헛되구나 후회할 뿐 그림 : 박유순 화가
뛰어난 지략`용맹함으로 5백 의병 지휘울진 등 6개지역 3년여 활동, 왜군 무찔러 6월1일은 「의병의 날」이다. 더구나 금년은 3.1 독립만세 사건 100주년이 되는 해로서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흔히 의병이라 하면 20세기 전후의 항일 의병만 연상하게 되지만, 임진왜란 초기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수는 관군을 능가했으며, 관군이 대응하지 못하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