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가니 탈모(脫毛)가 심각하다. 쉰 중반을 지나면서 급속도로 머리숱이 줄어든다. 그래서 최근에 나는 빨강색이 짙은 세숫대야를 샀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또 머리를 행굴 때마다 빠진 머리카락 무더기가 흰색 세면대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너무 마음아파,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싶어 짙은 색깔 대야로 바꾸었다. 그렇게 마음으로는 탈모를 애써 부정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지어낸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것일까, 창작이라는 말 뒤에는 고통이란 단어가 달라붙는다. 그 고통은 원래 없던 것을 만들어낸 죄로 받는 벌이라고 한다. 그래서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은 냉고병(冷苦病)을 앓게 마련이란다. 즉 춥고 배고프다는 소리다. 자녀들이 진로를 선택할 때 부모님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는 학과들인데 철학, 문학, 음악, 미술
입추가 지나도 폭염으로 잠 못 드는 열대야다. 쉬이 잠들 것 같지 않아 캔 맥주를 사들고 근처 산기슭 공원을 찾았다. 밤 열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운동을 나온 사람들은 전깃불이 대낮같은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 야외 스탠드에 누워 몇 개 안 되는 밤별을 세어본다. 그리운 그 저녁들을 떠오른다. 내 고향 울진 산골은 1977년 여름이 지나서야 전기가 들어
지난 6월 23일, 전국날씨는 군데군데 간간이 비가 내렸고, 서울은 잔뜩 흐린 채 습도가 높은 그저 그런 장마철 날씨였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파란만장한 사연을 남긴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그날 오전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6번의 국회의원과 두 차례 국무총리. 5,16이 있던 1960년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현대사는 그를 빼놓고 설명할
딱히 출근시간이 따로 없다보니 8시 반쯤 다소 늦은 시간에 아침을 먹는다. 원래 세 식구지만 아들이 군대에 간 지금은 아내와 단 둘이 식탁에 마주하니 당연히 오붓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나는 밥상에 코를 박고 후닥닥 먹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5분 만에 아침밥을 해치운 다음 뒤통수가 뜨거울 정도로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집을 나온다. 근처 내 사무실에
먼저, 이 귀중한 지면을 나에게 할애해주신 전세중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처음 제안을 받고 내가 과연 이 귀한 저서에 추천사를 쓸 자격이 있나 싶어 머뭇거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윗분들께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할 때, 앞에 성씨나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유일한 분이 전세중 작가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나
지금 사는 동네 뒤에는 관악산 둘레길이 있어 산책하면서 사색을 하기에 너무나 좋다. 거의 매일 한 시간씩 둘레길을 걷다시피 하는데, 이맘때는 알을 품은 봄 꿩들이 여기저기서 꿩꿩댄다. 우리 속담에 “봄 꿩이 제바람에 놀란다.”는 오월이다. 시골은 어떤지 몰라도 지금 서울 야산에 사는 꿩들은 알을 낳기 전까지는 불과 20여 미터 거리를
살아오면서 이 사람이 살던 시대에 태어난 것이 행운이었고, 그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아서 행복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2명 있다. 마이클잭슨과 스티븐스필버그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사람의 기억과 추억의 총합이라고 했을 때, 내 메모리에 축적된 무수한 편린들의 형성에 저 두 사람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까마득한 시절,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전
1970년대 중반, 후포항 후포극장에서 ‘맹룡과강’을 봤다. 자다가 이불을 걷어찰 짓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것이 영화지만, 그 시절만 해도 영화를 본다는 것은 연례행사였을 정도였고, 드물었던 만큼 영화를 보고나면 감정이입이 깊고 오래갔다. 그래서 무술영화를 보고 나오는 남자는 건들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자기가
격세지감이라는 어휘가 미흡해서 그보다 강렬한 용어를 골라봤지만, 오늘의 현실을 표현할 마땅한 말을 결국 찾지 못하고 대략 격세지감의 열배 쯤 되는 느낌이라 적는다. 당장 내 손 안에 놓인 인터넷을 통해 벌어지는 이 엄청난 판 뒤집힘에 하도 놀라 넋을 놓고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지낸지 오래다.여기서 말하는 뒤집힌 판은 몇 년 간의 정치판이다. 이럴 때 대다수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경기도 광명시에는 20대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객지친구가 산다. 출판사에서 같이 편집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지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말은 작가지만 그다지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았던지 젊은 시절부터 신춘문예에 수도 없이 도전을 해봤지만 실패하고, 40대 중반에 뒤늦게 지방 계간지에 소설로 등단해 활동을 하는 친구다. 그도 나와
주변에서 술꾼이라 자부하는 사람들도 가끔 자작(自酌)과 독작(獨酌)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진정한 술꾼이라면 두 용어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작(自酌)은 술상대가 있음에도 혼자 술을 따라 마시는 것을 말하고, 독작(獨酌)은 말 그대로 술 상대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요즘 말로 ‘혼술’이
“그렇게 적게 먹으니 몸이 그 모양이지요.” 그 모양이라니, 이 모양이 어때서? 키 170센티에 58킬로그램 정도의 몸무게를 유지하며, 내 나름으로는 대한민국의 표준이라 자부하고 살았는데, 근래 와서 비쩍 말랐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가 싶다가도 가끔 화가 난다. 나는 분명히 표준이었고 그 상태로 살아왔을 뿐인데 ‘그 모
영화가 시작 되면 전쟁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 조선군 병사들이 도열해 있다. 바람이 깃발을 펄럭이며 세차게 지나갈 때, 고함에 가까운 구령이 재빠르게 뒤따른다. “배! 흥! 평신!”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도 그 구령은 다시 나타난다.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조선의 왕은 그 구령에 맞춰 머리를 땅에 조아린다. 그 구령은 황제
요즘 항간에는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정치권에서는 저마다 아전인수(我田引水)하는 셈으로 한마디씩 난체하며 던지기도 하고, 영화를 본 일반관객들도 영화 한편 관람에 마치 역사를 관통한 듯 오늘날 우리나라 상황에 빗대 자기 나름으로 비판하고 비난한다. 방향 잃은 비난의 화살들이 공중에 난무하는 이 현
울진신문이 지난 10월 5일로 창간 26주년을 맞았다. 지금이야 울진에만도 언론매체가 네 군데나 되고, 또 굳이 언론을 통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울진에 관한 소식이나 게시글이 쏟아지는 시대다보니 울진신문의 역할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인터넷이 일반적이지 않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거의 유일한 창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울진신문이 집으로 배달되면 내 글을 스마트 폰 카메라로 찍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보낸다. 자랑삼아, 안부를 겸해서 보내놓지만 답변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대부분 건성으로 ‘수고가 많네’ 정도의 인사말이거나, 기껏해야 엄지를 치켜세운 스티커 사진이 반응의 전부였기 때문이다.그런데 지난 번,
우리나라에서 유명 시인으로 몇 손안에 드는 안도현 시인이 얼마전 울진을 방문하여 시(詩)의 감상과 창작에 대한 특별강연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내 어린 시절 ‘추억의 연탄재’가 떠올라, 당장 달려가 방청객의 일원이 되고 싶었으나 울진이 너무 멀어 포기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국민 너나없이 안 시인을 떠올리면, 발에 채이던 연탄재를 연
얼마 전, 즐겨 읽는 일간지 칼럼에서 ‘알쓸신잡’이라는 낯선 용어를 접했다.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 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야구중계 말고는 TV를 거의 안 보는 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동료에게 물었더니, 오락 프로그램이지만 내용은 어마어마한 지
58년 전 사라호 태풍 이재민 66세대 364명 이주 밴드 주관 출향인 60여명 일손도와◆울진마을의 역사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에는 無에서 有의 기적을 이룬 울진 사람들이 산다. 그들이 울진에서 머나먼 철원으로 가게 된 까닭은 1959년 추석 날 새벽에 닥친 태풍 ‘사라(Sarah)’ 때문이었다.사망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