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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장씨의 정신적 요람인 월계서원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분명한 자기 인식의 바탕이 있을 때, 우리는 방황하거나 혼란없이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울진신문은 이번 호부터 이러한 우리 자신들을 알기 위해 우리고장의 토속 성씨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군민들의 성씨가 모두 104개나 되므로 모든 성씨들을 다 찾아 볼 수는 없고, 지역 원로 분들의 자문을 받아 본향을 울진으로 하거나, 지금도 한마을에 수십 호 집성촌을 이루어 살거나, 향토사에 많은 큰 영향을 끼친 성씨를 기초로 대략 12개의 성씨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 첫 회로 울진장(張)씨를 찾아 나섰다. - 편집자 주

우리군내 장(張)씨 성을 가진 사람 수는 본관에 관계없이 2000년 11월 1일자 울진군 통계에 의하면 약 1천300가구에 약 3천300명으로 파악된다.
이는 울진군내 104개 성씨 중 인구수에서 김, 이, 박씨를 제외하고는 4위에 달하는 대성으로서 원남면 전체 인구보다는 많고 근남, 기성 전체 인구보다는 약간 적다.

그러나 우리지방의 토성이라고 할 수 있는 울진장씨는 약 800가구에 인구가 약 2천명 정도이고, 인동장씨가 약 400가구에 인구 1천명 정도이며, 안동과 단양을 본향으로 하는 장씨가 각각 20여가구에 50명 내외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외에 타 지방을 관향으로 하는 장씨들이 있지만 극소수이다.

울진장씨는 현재 우리군내 북면 신화리와 소곡리, 울진읍 호월리, 근남 수곡리, 기성 정명리 등 4개 마을에 20~40여호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장씨는 중국에서 들어왔으며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안동장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의 선조는 신라말에 들어왔고, 덕수장씨의 시조 장순용은 아랍(이슬람)계의 사람으로 고려 고종 때에 , 절강장씨의 시조 장해빈은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들어 왔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장씨는 안동장씨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울진장씨 또한 안동장씨 장정필의 후예이다.

전국적인 장씨 성의 구성은 총 63개의 본관에 전체인구가 약 90만명에 달한다.
현재 우리나라 장씨의 대종파는 인동장씨로 그 수가 전국에 약 54만명에 달해 최대 종파이며, 그 다음이 안동장씨로서 약 6만 5천명이고, 세 번째가 울진장씨로서 전국에 약 1만8천명이 살고 있다. 그외 타 관향 장씨족은 많아야 수천명 정도의 소수이다.

울진장씨 장세도(張世棹 72세·죽변) 대종회장에 따르면, 시조 장정필(張貞弼)은 중국 절강성에서 한반도로 들어와 안동에서 권행, 김선평과 합세 후백제의 견훤군을 물리쳐 고려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개국공신으로,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라는 관직과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분에 대해서는 안동시 북문동의 안동 삼태사묘(三太師廟 : 장정필, 권행, 김선평 3분을 모신 사당)에 모셔져 삼태사 후손들이 함께 매년 두번 제사를 올리고 있고, 묘소는 안동군 서후면에 있다.
시조의 증손인 송계공 장지현(張之賢) 대에 와서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막내아들 장말익(張末翼)이 려조 정종 때인 1035년 문과에 급제하고, 울진군(蔚珍君)에 봉해 졌는데, 이 분이 울진장씨의 관조(貫祖)이자 울진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그는 삭방도 안렴사(현, 강원도지사)의 벼슬에 올라 선정과 덕행으로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시호에 글월 문(文) 자가 들어 감으로서 문향울진의 시원이 되었다 한다.
그후 7세손 장칭제, 8세손 장량수, 10세손 장천익, 11세손 장인숙, 12세손 장천영, 장천길 외 20여명이 과거에 급제 명문세족의 전통을 이어왔다.

특히 고려조 개국공신의 가문으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장천영(張天永)은 전생, 최복하 등과 고려복벽운동을 벌이다 많은 박해를 받아 충의의 가문이기도 한데, 수많은 향토사적 인물들을 배출, 울진역사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울진장씨의 정신적 요람은 울진읍 고성리 가원동에 있는 월계서원(月溪書院)이다. 이 서원은 조선 철종 7년(1856) 호월리에 월계사로 창건돼 6년 뒤 서원으로 승격되어 1925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했다.

1925년 이곳에는 울진장씨의 입향조 장말익공과 8세손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한 장량수(張良守)공의 두 분 위패를 모시고, 연중 두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삼월 삼짇날은 문중에서 시월 중정일에는 울진군내 유림들의 모임인 향접(鄕接)에서 주관한다.
특히 이곳에는 장량수 과거급제패지(科擧及第牌旨)가 우리나라 최고의 현존 행정문서로서 국보 181호로 지정돼 이 곳 국보각(國寶閣)에 보존되고 있다.

장세도 대종회장은 군청 뒤에 연건평 150평의 3층 대종회관 건물을 금년말 준공할 예정이라 한다.
이 건물 3층에다 대종회사무실, 울진군종친회사무실, 청장년회사무실을 만들어 울진장씨의 명문 전통을 충실히 이어갈 것이라고.

울진장씨의 남다른 자부심은 대종회관 건축 기금을 모금하는데서 뚜렷이 드러났다. 전국 8개의 종친회에서 약 740명의 종친들이 건축재원 5억원을 선뜻 기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울진장씨 대종회는 전, 답, 임야를 합해 54필 수만평의 토지를 보유 다른 문중보다는 훨씬 많은 문중부흥을 위한 든든한 밑천을 가지고 있다.

울진입향 약 1천년, 한때 우리고장을 다스렸던 명문세족,지금도 울진 토성씨 중에서 가장 많은 자손 수 , 이러한 울진장씨들의 문중의 자존심이 애향심으로 승화되어 나타날 때 울진은 한층 더 발전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나의 뿌리는 어디인가!를 알고자 하는 노력의 의미가 될 것이다.


                                                                      /전병식 편집국장


                                                  입력 : 2005년 02월 25일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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