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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해 월송정 입구에 있는 황씨 도시조 락(洛)의 유허비

향토역사를 통해서 평해황(黃)씨라고 하면 토착연원이나 족인의 수, 고관대작 배출의 수에서 과히 울진남부지역인 기성 이남을 대표하는 토성씨라고 불려질만하다.

특히 기성 사동의 해월헌(海月軒) 뒤 사당에 모셔진 불천위(不遷位:나라에서 영구히 제사를 올려야한다고 지정한 위패) 해월 황여일(黃汝一) 선생 같은 분은 수백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평해황씨 황병대(69세·전 기성면장) 대종회장은 가문에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지만, 해월선생과 해월의 10세손 국오 황만영(黃萬英) 선생이 있음으로 해서 자신의 가문이 명예롭고 울진의 이름이 한층 빛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기 28년(신라 유리왕 5년) 후한 사람 황락(黃洛)이 평해구(丘)씨의 시조 구대림과 함께, 오늘날 베트남에 위치했던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으로 평해에 표착해 정착함으로서 평해황씨의 도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대에 갑고 을고 병고 의 3형제가 있었는데, 갑고(甲古)는 고구려 민중왕이 기성군(箕城君)에 을고는 백제의 다루왕이 장수군에 병고는 신라 유리왕이 창원백에 봉(封)함으로서 각각 그곳을 세거지로한 관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또한 종사가 분명치 않아 고려초기 태자검교를 지냈던 온인(溫仁)을 평해 황씨 시조로 하여 이때부터 계대수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황씨는 모두 도시조 황락의 후예로서 55개의 본관을 가지고 있으며, 남한에 현재 약 20만가구에 인구 약 65만명이 살고 있어, 성씨 별 전국 인구 순위에서 16번째를 차지하는 대성이다.

최고 번성한 가문이 창원황씨로 황씨 전 인구의 약 40%에 달하고, 그 다음이 장수 황씨로 약 25%, 그 다음 평해 황씨가 약 15%를 차지하여 세 번째인데 남한 전역에 약 13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울진에는 현재 황씨 성을 가진 사람이 모두 1천여 가구에 인구가 2천400명을 약간 상회하여 김, 이, 박, 장, 최 다음으로 6대 성에 속한다.
이중 평해황씨는 90%를 넘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은 기성면의 다천, 정명, 사동과 온정의 소태, 덕산 그리고 평해 오곡에 수십호 씩의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는데, 지금은 많은 가구가 출향하여 혼성촌을 이루고 있다.

시조의 3세손으로 고려조 문하시중에 올랐던 유중(裕中)의 아들 서(瑞)도 문하시중에 올랐는데, 그는 원나라에 31차례나 다녀오는 뛰어난 외교공적으로 충렬왕은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내리고 당시 평해현을 평해군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황희석(黃希碩)은 고려말 무신으로서 이조개국 2등공신으로서 지중추원사의 벼슬에 오르고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졌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황준량(黃俊良)은 퇴계의 수제자로서 중종, 인종의 실록을 편수하는 등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 풍기 의곡서원과 신령 백학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외에도 고려조 삼도관찰사를 지냈던 황천계(黃天溪), 공조판서를 지냈던 황유정(黃有定), 성균관 대사성 황현(黃鉉)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해월 선생의 중부(仲父)였던 조선중기의 학자 황응청(黃應淸)은 평해군지인 당시 기성지(箕城誌)를 저술하고, 당시 지방자치법인 향당헌(鄕黨憲)을 만들었는데, 그는 기성 정명의 명계서원에서 배향되고 있다.
해월 선생의 아들 황중윤은 대 문장가로서 한문소설 천군기(天君記)와 조천록(朝天錄)을 저술 한국고대문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기성 사동에 있는 해월헌의 주인 황여일은 조선 명종 11년 기성 사동에서 태어나 14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면서 이후 각종 국가시험에서 우수성적으로 급제하면서 당대 최고수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 는데, 그의 인품과 학문적 깊이가 평해황씨 집안의 명망을 후세에 각인시켰다.

그는 조선의 명나라 변무진주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서 조선에 대한 명나라 조정의 오해를 풀게 했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종사관으로 참전 행주대첩에서 공을 세웠다.

또 백호 임제(林悌)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여 저술한 「몽유록」에 서슴없이 발문을 써 줌으로서 충의와 절의의 기개도 드높았으며, 퇴계문집 발간을 감수하였고, 7책 14권의 문집을 남겼다.

그는 당시 권문세가였던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의 조카 사위였고, 이후 그의 후손들도 퇴계가문인 진성이씨, 왕손가인 전주이씨, 서애 유성룡 가문인 풍산유씨등과의 통혼과 교류를 통해 전국적인 명문가로서의 반열에 있었다.

한말의 황만영 선생은 해월가 천석 수확의 부를 애국적으로 해체하면서 나라와 민족 앞에 울진의 이름을 내세운 불후의 지사이다.

일제가 조선을 잠식해오자 1907년 사동에 대흥학교를 세우고, 백운 주진수 선생의 만흥학교 설립을 지원하여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가 하면, 의병장 현호우에게 엽전 800냥을 희사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울진사람 100여가구를 간도에 이주시켰으며, 이시영 선생의 간도 신흥학교 설립에도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그는 1913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시베리아 대한민국회의에 서간도 대표로 참석하는등 항일 구국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선생은 임정 내부의 파벌적 대립을 보고 애통한 마음에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혈서를 써서 보내기도 한 우국충정의 지사였다.

한 때는 평해지역을 다스렸던, 충분히 그들의 자존심을 내세울만한 선조와 그 정신이 살아있는, 울진에서는 두번째 갈 수 없는 명문 세가의 집안임을 누가 부정하랴!

평해 월송리 국도에서 월송정 들어가는 왼편 수백년 된 송림숲 약 2만 5천평 이곳이 황씨의 도시조를 모시고 있는 영지로서, 지금도 매년 10월 중정일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천명의 후손들이 찾아와 제사를 올리며 족인의 우애를 확인하고 있으니….

                                                        /전병식 편집국장




입력 : 2005년 02월 25일 1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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