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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의령 고성 남씨(南氏)편 - 대제학 6명 배출한 명문가
2011년 01월 18일 (화) 12:09:31 [조회수 : 13636] 울진신문 webmaster@uljinnews.co.kr

 [조회수 : 1741]

이조 오백년간 가문의 번영 누려 학문과 기개와 덕행의 인재 많아

   
 
▶[위]입향조와 해운(海雲) 격암(格庵)선생을 모시고 있는 상현사(尙賢祠) [아래]영양남씨의 관조(貫祖) 남홍보(南洪輔)의 비각


대개 유명 성씨들은 시조에 대해 그 탄생이나 설화를 만들어 의도적으로 장광설로 포장하고 미화한 듯한 기미를 느낄 수 있으나, 남씨는 시조에 대해 사실적이며 단순화하여 남다른 정직성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사나이 대장부의 호연지기를 노래한 남이장군, 천문지리와 주역에 통달 세상의 이치에 관통한 남사고, 뛰어난 학문과 절조로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다가 결국 부관참시를 당한 남효온 같은 인물들을 배출한 가문치고는 빈약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남씨의 시조는 중국 당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인 (汝南人) 김충(金忠)이다.

그는 당나라 현종 때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죽도에 기착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신라 경덕왕(서기 755년)이 남씨(南氏) 성을 하사하고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자 이름마저 민(敏)으로 바꾸었다.

시조의 묘소는 영양 일월산 부용봉 아래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동부리에 모셔져 있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현재 남한 전역에 분포한 남씨 족인 수는 모두 약 8만 가구에 26만명으로 그 중 의령남씨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의 약 2/3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영양, 고성 순인데, 우리나라 성씨별 인구순위는 30위이다.
고려 충렬왕 때에 시조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의 후손인 홍보(洪輔) 군보(君甫) 광보(匡甫) 3형제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홍보는 영양군(英陽君)에 군보의 차자 익지공(益胝公)은 의령군(宜寧君)에 광보는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짐으로서 3개의 본관으로 갈라졌다.

울진에는 현재 남씨성을 가진 사람 수가 모두 750여 가구에 약 2천여명이 살고 있어 울진의 성씨별 인구 분포에서 김 이 박 장 최 황 다음으로 일곱번 째를 차지하는 대성(大姓)으로 거의 대부분이 영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울진 입향조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서기 1400년 경 고려말 홍보공(洪輔公)의 7세 손인 내시원신호위보승중랑장(內侍원神虎衛保勝中郞將)이었던 남영번(南永蕃)으로 그의 묘소는 죽변면 화성1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2일 제사를 올린다.

입향조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호(顥)는 만호공파(萬戶公派), 이(頤)는 현감공파(縣監公派), 령(領)은 반송공파(攀松公派), 막내 수(須)는 송정공파(松亭公派)를 이루었다.
울진에는 현재까지도 울진읍 정림리, 죽변면 화성리, 북면 고목리, 근남면 노음리 행곡리, 원남면 금매리 매화리, 그리고 온정면 소태리 선구리에 20~60호 씩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울진의 여타 성씨들과는 달리 남씨 문중에서는 이조의 개국에 1등 공훈을 세움으로서 조선조에 숱한 현신(賢臣)과 학자를 배출했다.

고려조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던 의령 남씨의 관조(貫祖) 군보의 증손으로 을번(乙蕃), 을진(乙珍) 두형제가 있었는데, 동생 을진은 이태조가 간곡히 출조를 요청 사천백(沙川伯)에 봉해 그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을진은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며 더 깊은 산속의 석굴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절조를 지켰다고 한다.

반면 형 을번의 아들 재(在) 와 은(誾) 두형제는 조선개국에 1등공신으로 참여 재는 영의정에까지 올라 이후 의령남씨 문중에서만 정승 6명과 대제학 6명, 24명의 판서가 나올 만큼 가문의 번영을 이루었는데, 이조를 통틀어 대제학 6명은 조선조 최고 가문인 전주이씨 연안이씨 광산김씨의 가문에서 배출한 각각 7명의 대제학에 버금가는 숫자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언제 갈려 하느뇨 라는, 유명한 시를 남긴 이는 남구만(南九萬)으로 남재의 후손이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과 대제학을 지냈고, 4색당쟁의 한 파인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시 정계를 주름잡던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남씨문중에서 추앙받는 인물중에서 으뜸은 역시 남이(南怡)장군이다.
장군은 17세의 어린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는데 출생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범함을 볼 수 있다. 세조 13년에 북관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우대장으로 출전 이를 토벌하고, 건주위(健州衛)를 칠 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26세에 조선조 최연소 병조판서에 올라 조선의 국방을 책임지게 되어 동북아 일대를 호령할만 인물이었으나, 유자광 등이 모함하여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그 애석함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하고 있다.

20대에 만주벌판을 굽어보며 천하를 평정하겠다는 사나이 대장부의 기개와 웅지가 드러나는 시 한수를 남겼는데,
白頭山石磨刀盡/豆滿江水飮馬無/男兒二十未平國/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푸른물을 말을 먹여 다 없애니/ 남아 이십에 나라평정 못하면/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라고 읊었다.

또 한 사람 인물은 생육신(生六臣)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다. 그는 사육신 사건이후 정계와 발을 끊고 선비로서의 지조를 지켰는데, 주위의 만류에도 “내 어찌 죽기를 두려워 대현(大賢)의 이름을 숨기리오” 하면서, 야사(野史) 「육신전(六臣傳)」을 완성했다.

그리고 또 울진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탁월한 인물이 있으니,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이다.
그는 중종4년(서기 1509년)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설두(雪竇)에서 태어나 천문교수를 지냈는데, 천문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주역에도 달통하였고 천지의 음양조화를 밝혀 해동(海東)의 강절(康節)이라 불렸다.

태극의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여 완역도(玩易圖)를 그렸으며, 임진왜란, 4색당쟁, 문정왕후의 하세(下世)등을 미리 간파한 예언가로서 「격암유록 格庵遺錄」, 「남사고비결 南師古秘訣」 등의 저술을 남겼다.

또 울진에는 본래 대나무가 없었는데, 영양관 남군보의 8세 손 회(薈)가 제주목사를 하고 귀향할 때 가져와 서쪽 동산에 심어 번성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고 있다.

남씨문중은 울진의 독립유공자 30여명중 10여명이 남씨문중 사람으로서 애국충정에 빛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의병장 남태영(南泰永)은 한말 울진 서면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양 봉화 영주등지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이다가 봉화 재산면 말밭(斗田)에서 36세에 순절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매화장터에 이어 벌어진 흥부장터 만세 사건에는 남재량(南載亮), 남광호(南光鎬), 남병표(南炳豹)등이 체포되었으며, 109명이 체포된 조선독립공작당 사건에서도 남왈성(南曰星) 남석순(南石順) 남왈기(南曰紀)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6명이 목숨을 잃어 울진 최대의 희생자를 낸 창유계(暢幽 ) 독립운동사건에서 남지학(南志學) 남원수(南源壽), 남석순(南石順) 남복이(南福伊)는 옥사하고, 남용식(南龍湜)은 3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울진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학자로는 9세 손 진사공(進士公) 남전(南荃) 과 12세 손 임천공(臨川公) 남세영(南世英) 22세 손에 봉산(鳳山) 남목영(南穆永), 무실(務實) 남진영(南軫永)과 23세 손 정제(正薺) 남대년(南大年) 우산(愚山) 남상규(南相奎) 등이 있다.

남종열(70세) 전 울진군종친회장은 전국 종현들의 성금 약 3억원으로 죽변면 화성1리 숭조(崇祖) 성역화사업이 준공되어 오는 5월이면 고유제(告由祭)를 모시게 될 것이란다.
이 사업에는 중대광공(重大匡公) 홍보(洪輔)의 비각과 실전(失傳) 8위(八位)의 비석 건립, 상현사( 尙賢祠) 중건, 중랑장( 中郞將) 입향조의 묘역 정화이다.

상현사에는 입향조와 요승(妖僧) 학조(學祖)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해운(海雲) 남계명(南季明), 그리고 격암선생을 모시고 있다.

남문열 회장은 이조 500년 동안 최고의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 학문과 기개와 덕행의 가문으로 뛰어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문중의 위업을 찬란히 꽃 피워 온 가문으로 한말 구국의 대열에도 앞장섬으로서, 울진에서의 전주남(田朱南)이라는 토성(土姓)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역사적인 바탕이 매우 견고함을 보여주고 있다며, 후예들이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 빛난 조상의 얼이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전병식 편집국장


입력 : 2005년 02월 25일 14:10:00 / 수정 : 2007년 04월 20일 16: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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