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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창업에 반기 든 충의의 가문, 한一家에서만 애국지사 7명 배출


울진최씨대동종친회 최연국회장(68세·전 군농업기술센터소장)은 최씨 성에 대해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거족으로 최씨만의 기질적인 특성도 남겼는데, 특유의 꺽일 줄 모르는 강기와 굳건한 신념, 그리고 의리와 의협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전통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최(崔)씨 성을 가진 사람 수는 우리나라에 약 220만 명으로 4대성(四大姓)에 들어가는 거족이며, 울진에도 김 이 박 장 다음으로 약 3천여명이 살고 있어 울진 5대성(五大姓)에 속한다.

최씨의 성씨 유래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서기32년 신라 유리왕(9년)으로부터 최씨 성을 하사 받아 유래 한 것으로 오늘날 최씨 대개는 소벌공의 후예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하여 경주최씨의 시조이며, 신라 말기 대 문장가로서 소벌공의 24세 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을 최씨의 실질적인 도시조로 숭배하고 있다. 그는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되어 사상 최초로 공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 그는 천년 신라의 최고 지성이었다.

열두살의 어린나이에 당(唐)나라에 유학, 17세에 과거 급제하여 당나라의 관직에도 올랐고, 특히 산동(山東)지방에서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 때, 그가 지은 「토(討)황소격문」은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진다.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시독겸 한림학사(侍讀兼 翰林學士)의 벼슬 등에 올라 신라의 쇠국을 막아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벼슬을 사직하고 명산을 찾아 다니며 자연을 벗삼다가 여생을 마쳤는데, 그는 「계원필경(桂苑筆耕)」, 「석순응전(釋順應傳)」 등의 3편의 한문시집을 남겼다.

최치원을 기점으로 윗대와 아랫대에서 많은 분파가 이루어지는데,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 등은 윗대에서 본관을 달리하고, 최치원을 1세로 하는 아랫대에서는 맏아들 최승로 계통의 후손에서 함양 청주 수원 부안 강릉 통천 원주 등으로 분관되었으며, 지손에서 해주 전주(최균) 등으로 갈라졌다.

 최씨성의 약 45%인 경주최씨가 최씨의 주종을 이루어 번성하였고, 해주최씨, 우봉최씨 ,전주최씨와 동주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떨쳤지만, 최씨전반 신라와 고려시대에 세력이 왕성하였다.

본관별 220만 명의 최씨 분포는 경주최씨가 약 97만명으로, 우리나라 전체성씨 본관별 인구순위에서 7위로 으뜸이며, 다음이 전주최씨로서 약 40만명, 그 다음이 해주최씨가 약 18만명이며, 그 다음이 강릉최씨인데, 전국성씨 본관별 순위 54번째로서 인구수가 약 14만여명이다.

 현재 울진에는 최씨 성 인구수가 약 1,110세대에 3천여명이 살고 있는데, 경주최씨가 670세대 1,730명, 강릉최씨가 230세대에 620명, 해주최씨가 97세대에 234명, 그 다음으로 전주최씨가 약 50가구에 140여명이 살고 있다.

125개의 많은 본으로 갈라져 있는 ‘최씨 성’ 편의 집필에 들어가기에 앞서 경주, 강릉, 해주문중 어른들의 의견을 들어 여타 문중도 살피되, 입향도 빠르고 향토사에서의 역사적 비중도 큰 「강릉최씨」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였다.

 강릉을 본관으로 하는 최씨의 시조는 세 분이다.

한 분은 고려 개국의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었던 최필달(崔必達)로 그는 좌정승에 오르고 경원(강릉)부원군에 봉해짐으로서 강릉최씨의 시조가 되었고, 또 한 분은 고려 태조의 부마 최흔봉의 12세 손 최입지로서 고려말 문하평리 상호군으로 공을 세우자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져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한다.

 또 한 분은 고려 충숙왕의 부마였던 최문한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 일족이다.

최필달은 고려초기 학문을 정립하고 예를 가르쳤던 문무겸비의 학자로 해동부자( 海東夫子)로 일컬어졌다.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한 황산사(篁山祠)는 그의 위패를 모신 강릉최씨의 성역으로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다.

강릉최씨의 역사적 인물로는 시조의 4세손으로 삼중대광( 三重大匡)에 오른 최숭언, 충렬왕 때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명주군( 溟洲君) 에 봉해진 최한주,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최원량 등은 고려조의 인물이다.

최치운(崔致雲) 일가는 조선조에 강릉최씨 가문을 명문가로 만들었다. 그는 집현전직제학을 지내고, 태종의 신임을 받아 사신으로 다섯차례나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둘째 아들 최응현은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3번이나 대사헌을 맡을 만큼 능력이 출중했다.

백면서생(白面書生)인 최치운의 증손 최수성은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고, 시문 서화 음률 수리 등에 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이었다고...

최치운의 셋째 아들로서 판서를 역임했던 최세절의 5세 손 3형제는 나란히 문과에 급제, 그 중 막내였던 최문식은 대사간에 올랐다. 현대의 인물로 제10대 대통령을 지냈던 최규하씨와 부총리를 지냈던 최각규씨가 강릉최씨의 후예이다.

강릉최씨의 울진입향조는 최필달의 후예이며 대사간의 벼슬까지 올랐던 최복하(崔卜河)로서 고려 공양왕2년(1391년)에 북면 고목리로 들어왔다. 이후 1490년에 최흔봉의 후예 최운생(崔雲生)이 입향하였다.

현재의 매화리 최촌(崔村)이 최필달 후예의 집성촌이다. 울진읍 신림리 최씨 집성촌은 해주최씨 집들이고, 명도리 일대 집들은 경주최씨 문중이다.

최복하는 장군 장천영과 임제 그리고 태학생 전생 등과 모의하여 고려복벽계획을 세우고, 울진 삼척 일원에서 지사들을 규합하다 탄로가 나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손자 최시창은 또 조선 문종 때, 벼슬이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였는데,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그의 아들 최면(崔沔)과 함께 순절함으로서 울진의 강릉최씨 문중은 이조 들어 벼슬길이 막혔다.

이로인해 울진의 강릉최씨를 살펴보면 관직에는 별로 이름이 없지만, 반골의 가문답게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난 충의의 인물들이 많다.

최중모는 매화 장터 만세사건에 가담하여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신간회 등에 소속되어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고, 최황순과 최효대는 비밀결사 창유계를 조직 상해 임정을 돕는 등의 활동으로 발각되어 최황순은 징역 6년형을 받았고, 최효대는대구형무소에서 희생되었다.

그리고 북면 나곡리에서 태어난 최익한(崔益翰)과 그 일가의 빛나는 항일 투쟁사가 있다.
국학 역사 실학 등의 이론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였던 최익한은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당시 최고 엘리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두차례에 걸쳐 10년간의 옥고를 치뤘으며, 그의 일가 재산 대부분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여졌다.

그는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해 조선·동아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가 하면, 대중신문의 편집국장으로서 국민들에게 항일,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그가 저술한 「여유당 전서 독후감」, 「조선사회 정책사」, 「실학파 정다산」 등은 그 분야의 독보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을 만큼 이론과 분석이 탁월하다 한다.

그의 당숙인 최진순, 그의 동생 최익래, 그의 두 아들 최재소 최학소, 그리고 그의 두 조카 최경소 최명소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가 최하 징역 8월에서 ~3년까지를 복역했는데, 그의 맏아들 재소는 함흥법원에서 2년6월 형을 복역 중 옥사하여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했다.

최익한의 1개 항일가문에서 모두 7명의 애국지사가 배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강릉최씨 가문의 오랜 전통정신인 특유의 강기와 신념, 의리숭상의 덕목으로부터 출발하는 반골 충의정신의 축척된 역량이 계승 발휘된 것으로서, 이는 향토사와 대한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높이 받들어 질 것인데, 강릉최씨 후예들은 이러한 가문의 전통정신 보존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전병식 편집국장



입력 : 2005년 02월 25일 14:31:00 / 수정 : 2005년 10월 10일 12: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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