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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신의 시조는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 후손들은 어디에서 무얼하며 어떻게 번성하였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떠한 역사적 내력 속에 위치 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다.
각자 자신의 튼실한 역사적 뿌리의 토대를 알고 있다면,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의 삶 속에서 숭고히 빛나는 정신적 교훈에서 재충전의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중요한 의미를 독자들에게 널리 심어주기 위해 본지에서 <뿌리를 찾아서>라는 특집란을 기획, 토성씨에 대한 내력과 정신을 연재한 지도 12회 째를 맞고 있다. 이제 울진에서 토성씨 라고 할 수 있는 13개 성씨 중에서 금번에 「평해구씨」를 조명하고 나면 「온양방씨(溫陽方氏)」 만이 남는다. 그리하여 뿌리 찾기의 기획도 다음 회가 마지막 편이 될 것이다. 편집자 주


대만 필리핀 등 동남아 산재 강태공 후예, 세계종친회 개최



▶기성면 황보리에 있는 시조 구대림장군 묘소. 사진속 인물은 평해구씨 대종회 총무 구재운씨. [사진제공 후포역사연구회 신진철 부회장]


평해구씨는 단일 본으로서 시조는 원래 중국 당나라 상서공(尙書公) 구대림(丘大林) 장군이다.

2000년도 인구통계에 의하면 평해구씨는 전국적으로는 4천137가구에 1만3천176명이 살고 있어 우리나라 약 290여개 성씨 중 103 번째 인구수를 가졌고, 전국적으로 충남 서천, 경북 의성, 영양 상주와 강원도 철원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한국평해丘씨사관」에 따르면 시조 구대림 장군은 신라 문무왕 3년(서기 663년·당나라 고종3년)에 평해황씨의 도시조 학사공(學士公) 황락(黃洛)장군과 함께 일본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평해 앞바다 구미포(丘尾浦)에 안착했다.

구대림 장군은 이곳에 정착 벼슬이 광록대부좌복야상서(光祿大夫左僕射尙書)에 올랐으며, 황락 장군과 함께 백암산성을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예부터 평해황씨와 평해구씨는 친형제처럼 우의가 두터웠으며, 성이 다른 일가라 하여 혼인까지도 금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평해황씨는 전국적으로 약 13만여명이 있고, 울진에는 6대성에 속해 약 1천여가구에 인구 약 2천400명이 살고 있는 반면, 평해구씨는 전국적으로도 번성하지도 못했고, 울진에는 단 한가구도 살지 않고 있어 특이하다.

평해구씨의 시조묘가 울진에 있고 관향이 울진군 평해라 하더라도 단 한사람 살고 있지 않는 성씨를 다루는 데는 독자들에게 약간은 죄송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향토사적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있다고 보고, 자신의 뿌리에서 자긍심을 가진다면 남의 성씨에서도 역사적 귀감을 얻을 수 있다고 볼 것이므로 다루게 되었다.

또 충남 서천에서 대종회장으로 재임중이신 구재룡(69세·전직 군의원)옹은 매년 음력 3월 보름날이면 전국에서 후손들 약 150여명이 기성면 황보리 산 36-2번지의 시조묘를 찾아 와 제사를 올리고 있어 울진은 자신들의 정신적 본향이라며, 게재를 해야 한다는 요청도 있었다.

평해구씨의 정신적 성지가 울진이라면, 그들의 현실적 요람은 충남 서천이다.
우리나라의 평해구씨의 99%는 서천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문산면 은곡리, 시초면 신곡리, 마서면 계동리 일대 약 1천400여가구에 7천여명이 집성하여 살고 있는데, 문산면 지원리에는 시조를 위시한 선대들의 위패를 모셔 성역화한 청덕사(淸德祠)가 있다.

이곳은 조선 성종 때에 대문장으로 이름 떨쳤던 구종직(丘從直)의 3대 증손인 8세조 진사공(進士公) 구맹전(丘孟傳)이 중종조의 사화를 피해 충남 서천군 무산면 은곡리로 낙향하면서 평해구씨의 최대 보금자리가 되었다.
현재 그의 후손들은 주로 서천군과 보령군 그리고 부여군에 세거하고 있다.

대종회 총무 구재운(76세·전직 시초면장)씨는 “뒤로는 와우산(臥牛山)이요 앞르로는 금강(錦江)이라. 푸짐하게 여물을 먹고 배부른 황소가 옆으로 길게 드러누워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는 형세란 말이여!” 라며, 흥평(興平·구맹전의 7세손) 어른이 명당중의 명당에 자리를 잡아 자손이 번창하고 인물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丘씨의 유래는 본래 중국의 강태공(姜太公).
「중국丘씨사기」에 따르면 8개 성으로 분파된 강태공의 후손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오늘날 중국의 산동성 창락현 동남쪽에 위치한 영구(營丘)라는 곳이 발상지인데, 최초 구목공(丘穆公)이 지명의 구(丘)자를 따서 사용함으로서 세계 구(丘)씨의 대시조가 되었다.

중국 영구에서 시작된 丘씨는 대만에 50여만명을 비롯해 동남아 각지에 분포하고 있는데, 현재의 중국 丘씨 중 일부는 청조(淸朝)에서 공자의 이름이 丘로서 성씨로 사용을 금함으로써, 구(邱)씨로 변성하였다가 중화민국이 건국되면서 복성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丘씨는 지난 79년부터 매년 10월 대북(臺北)에서 세계丘씨 종친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평해구씨는 시조이후 약 600년 동안 세계가 단절된다. 그리하여 평해구씨의 1세조로는 고려 공민왕 때 인물인 구선혁(丘宣赫). 그는 당시 이방실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쳐 벼슬이 민부상서(民部尙書)에 올랐다.

고려말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지낸 구천우(丘天佑)는 평해구씨의 뿌리를 굳게 내린 2세조. 그는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냈던 춘호(春浩), 판사(判事) 춘경(春景), 낭장(郞將) 춘서(春瑞), 병조참의(兵曹參議) 춘보(春甫)의 4형제를 낳아 가문의 번영을 이룬다.

이들 4형제 중 춘보의 아들 차숭(次崇)은 조선 세종 때 영해부사를 지내고 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평해구씨는 조선조에 총 6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중 성종 때의 명신 안장공(安長公) 구종직(丘從直). 그는 세종 조에 문과에 올라 공조판서,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인물로 경학과 역학의 대가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가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字)로 근무할 때, 우연한 밤 경회루에서 세종 임금의 요청으로 공(公)이 춘추(春秋) 한 권을 내리 암송하니 왕이 감탄하여, 이튿날 그를 9품직의 말단 교서관의 교리에서 종 5품직인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전례가 없던 일로서 삼사(三司)의 반대가 막심하자 왕은 三司 모두를 불러 춘추를 외게 하였으나 공을 따를 자 없어 더 이상의 논란이 사라졌다고 한다.
공은 이후 1품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두 아들 달손(達孫), 숙손(夙孫)도 문과에 급제, 달손은 직제학(直提學)을 숙손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그리고 또 구치곤(丘致崑)은 조선 성종 조의 명신으로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감히 어전에서 왕으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를 서슴없이 진언했던 절신으로 유명하다.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평해구씨 가문이 배출한 인물로는 구덕환(丘德煥)이 있다.
경성의전을 졸업한 그는 동생 석환(奭煥)과 함께 상해 임정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해방후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을 거쳐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때 북괴군에 피랍되었다.

이후 평해구씨는 대문장 구종직의 후예답게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평해구씨 대종회 회장 구재룡 총무 구재운 041-952-1160 011-9809-1160
 

                                              /전병식 편집국장


입력 : 2005년 02월 25일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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