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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김씨(金寧金氏)편 - 신라 김알지의 후예
2011년 01월 18일 (화) 13:04:09 [조회수 : 13643] 울진신문 webmaster@uljinnews.co.kr


[조회수 : 1629]

김녕은 김해의 옛 이름


   
    ▶백촌 김문기 영정
김녕(金寧)은 김해의 옛 지명이다.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김해는 고대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였는데,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년)에 신라에 병합 금관군이 되었다가 고려 초기에는 금주 등으로 불리웠으며, 1270년(원종 11년)에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김해부로 개칭되었으나, 조선 태종때 다시 김해도호부로 고쳤다.

그러나 한 고을 두 이름의 김녕김씨와 김해김씨는 그 근원을 완전히 달리한다.
무상한 역사의 흥망성쇠 속에 김해 중심의 가라국 수로왕 계의 김해김씨가 역사의 표면을 장식하는 영화를 누렸다면, 경주중심의 신라국 알지(閼智)계의 김녕김씨는 이조 들어 김문기가 단종복위 거사의 주역으로 순절한 이후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울진군지에 의하면 김녕인의 울진 입향조는 모두 16명인데, 최초 입향은 1456년(세조 원년) 당시 삼척부사 였던 김길상(金吉祥)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근친이었던 이조판서 김관(金觀)의 아들 김문기(金文起)가 단종복위를 주도하다 김질(金 )의 밀고로 아들 현석과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기성 정명리로 퇴거한 것이 울진입향의 시초인데, 얼마전까지도 정명리는 김녕인의 집성촌이었다.

그의 묘소는 현재 기성 정명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중구일에는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리고 있다.

현재 울진의 김녕인은 약 600가구에 1천600여명이 살고 있는데, 울진의 본관별 성씨 인구수에서 9번째를 차지하고 있고, 전국적으로는 약 51만여명이 살아 전국 본관별 성씨 인구 수에서 평산신씨와 13~14번 째를 다투고 있다.

울진의 김녕인들은 울진과 후포를 번갈아 가며 매년 종친회를 가지고 있는데, 약 300여명 씩 모여 숭조목종(崇祖穆宗)의 정신을 키우고 있다. 울진에 김씨성들의 본관별 분포를 보면 김해김씨가 약 5천700명으로 단연 우세하고 그 다음으로 김녕인이며, 경주와 삼척 그리고 안동인들이 순차적으로 각각 약 1천여명씩이며, 그리고 광산김씨가 약 500여명, 의성김씨와 강릉김씨가 각각 순차적으로 300명 내외, 그리고 김광원국회의원의 선산김씨가 약 100여명 순으로 살고 있다.

김녕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는 《삼국유사》의 기이(紀異) 「김알지탈해왕대조(金閼智脫解王代條)」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서기 65년(탈해왕 9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櫃)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왕이 궤를 가져오게 하여 열어보자 용모가 뛰어난 사내아이가 그 속에서 나오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다. 금빛 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씨라 부르고, 성장함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그 이름을 알지라 하였다.
처음 발견된 장소인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2004년6월30일 증·개축한 백촌 김문기기념관


불사이군’의 전통 가문

한편, 《삼국유사》에는 이와 상당히 다른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 즉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가 큰 빛이 시림 속에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한가운데 황금궤가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있었고, 빛이 그 궤에서 흘러나오는데 흰 닭이 그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왕은 이 사실을 듣고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그 속에 있었다. 이 일이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옛일과 같으므로 그 말에 기인하여 알지라 이름지었다.

알지는 곧 우리말의 어린애를 뜻하며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뒤에 파사(婆娑)에게 양보하였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았다. 이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김녕김씨의 관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오다가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구분을 확실히 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년)에 김녕으로 확정하였다.

김시흥의 증손자 김중원(金重源)은 고려 시대에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形部侍郞)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김광저(金光儲, 김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로 절의를 지켰는데, 태종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김광저(金光儲)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호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 옥천의 백지리에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분성군(盆城君) 김정갑(金挺甲)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가 등극전의 정의(情義)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아산 도고산에 은둔 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조판서 김관(金觀)의 아들 김문기(金文起)는 1399년(정종 1년) 2월 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여 세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 때 이조판서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1456년(세조 2년) 6월 8일 사육신과 함께 순절했다.

거창과 양지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인 김문기를 따라 순절하였고,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金忠柱)와 증손 김현남(金玄南), 5세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로 가문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이 세워졌다.

한편 김준(金遵)은 천문, 지리와 실학에 능통 한 인물로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 고흥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김복룡(金福龍)의 아들 김응수(金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김언공(金彦恭)은 권율(權慄)의 영천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노모를 등에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응 세운 김유부(金有富)와 그의 아들 김기남(金起南), 김난생(金蘭生) 형제는 병자호란에 순절하여 김준걸(金俊傑, 선조 때의 공신), 김득성(金得誠), 김영길(金永吉, 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김진행(金鎭行)은 효행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과 효의 전통을 이어왔다.

이처럼 김녕인들은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한 종족인데, 현대 울진의 인물로서는 김정규 전 경북도 부지사가 김녕인이며, 전국적인 인물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녕인이다.

「김녕김씨의 계파」 -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 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 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 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 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 영돈영공준파(領敦寧公遵派) 진주목사공형파(晋州牧使公□派) 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 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 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울진군종친회연락처 김상득회장 788-2712, 016-9501-2712


                                                      /전병식 국장

입력 : 2005년 02월 25일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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