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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열의 살아온 이야기⑦
속(續) 보성고교 시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골상(骨相)”이라고
2011년 02월 16일 (수) 09:42:58 [조회수 : 3805] 울진신문 webmaster@uljinnews.co.kr


   
 
보성고등학교는 구한말 당대 제일의 재벌이며, 금광 왕인 이용익(李容翊) 어른께서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로서 순수 민간인이 세운 한국 최초의 학교이다. 보성 보다 먼저라면 미션계의 외국인이 세운 배재고등학교와 공립의 경기고등학교가 있을 정도이다. 휘문고나 양정고, 중앙고등학교는 우리보다 늦다.

보성학원은 해방을 맞이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학교재단의 대종은 토지였는데, 황해도 일대의 교 땅이 38선으로 인하여 북한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학원을 두 사람이 나누어 인수하게 된다.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은 중앙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던 전라도 지주 김성수 선생이 가져가고, 보성고보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인수 운영하게 되었다. 간송(簡松) 선생은 학교운영을 하면서도 틈틈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국보급 문화재를 사 모은 선각자요 애국자이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간송 미술관은 국립박물관보다도, 이병철선생의 호암미술관보다도 내용이 더 알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가 다닐 때의 보성고는 두 가지 특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나는 소수 정예주의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두발자유 허용이었다. 우리는 한 학년에 3학급 180명인데, 경기고와 서울고는 8학급 480명에 기여 입학생 2학급 120명을 더해서 600명씩이었다.

모든 학교가 중간고사, 기말고사, 년말고사로 학업성과를 평가하던 시절, 보성은 수시 평가제도를 실시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시험을 치루었다. 5분시험, 10분시험, 1시간시험 등 담당교사의 재량대로 성적평가를 했다. 정기적 예고평가보다는 어려웠고, 벼락치기 공부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당시 무시험 전형 입학제를 실시하던 연희대학교는 전국의 고등학교를 나름으로 A, B, C, D 4등급으로 분류하고 입학사정을 했는데, 보성고가 단연 “특(特)A” 마크로 상좌를 차지하였다.

이와 같이 수업면에서는 엄격했던 반면 생활면에서는 규제보다는 자율성을 강조했다. 두발은 완전자율이고 복장은 반자율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까까머리(스님머리) 신세를 면치 못하던 시절 우리들 보성중고 재학생은 당당히 머리를 기르고 대학생 대접을 받았다.

복장에 있어서는 교복은 다같이 입었지만 외투나 신발 등은 자율이었다. 이것은 당시 서원출(徐元出) 교장선생님의 철학이 담긴 조치였다. 초대 문교부 보통교육국장을 지낸 徐 선생님은 교복 따위는 일제시대 일본놈들이 시행한 잔재이지 우리 민족고유의 전통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없애야 하나 당시로는 가정형편상 어려운 집안이 더 많은지라, 교복은 때가 올 때까지 같이 입고, 기타는 각자의 취향과 개성을 살리는 쪽으로 자율을 인정해 주었다.

두발자율에 얽힌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영화구경차 극장에 가면, 학생입장불가의 경우 단속반이 나와 족집게처럼 잡아내는데, 후레쉬로 써치라이트처럼 돌리고 나면, 나는 무사한데 함께 간 서클친구인 경기고생은 불려나간다.

우리 학교는 그런 정도는 알면서도, 약간의 탈선이라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봐도 차별성이 주는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강장 밑에 약졸 없다는 속담대로 교장선생님 아래에는, 국전심사위원장도 지낸 이마동 교감선생님은 나중에 홍익대 미술대학장을 지냈다.

국어를 가르친 이훈종 선생님은 건국대 문과대학 학장이 되셨고, 이해영 영어선생님은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교수로, 강두식 독일어선생님도 문리대 독문학과 교수가 되고, 생물의 이승수 내 졸업반 담임선생님께서는 후일 경원전문대 학장을 지내셨다. 이분 선생님들이 계셔 오늘의 내가 있지 않나 여겨진다.

고교시절 나에게는 잊지 못할 해프닝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4학년(고등학교 졸업식은 끝났고 대학입학식은 하지 않았으니) 때의 일이다.

추운 겨울날. 새벽4시 통행금지 해제 싸이렌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심계원 국장이던 기봉이네 관용 검정 짚차에 올라탄 우리 일행은 정릉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당시 유명한 골상가(骨相家)가 있었다. 동경제국대학 철학과 중퇴의 해월(海月) 선생이었다. 평양 있을 때는 김일성의 골상을 봐주었고, 서울 와서도 이승만 대통령 골상도 보았다고 한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일본을 자주 가는데 그때마다 해월선생이 택일(擇日)을 해주고 있었다. 하루에 10명만 봐주었다. 그래서 새벽같이 가야 했다. 전신을 만져보고 자로 재어보고 숫자로 풀어내었다.

“일봉이화(一蜂二花)”라 두 아내를 거느릴 팔자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 영의정(領議政)은 따 놓은 당상이란다. 주의사항 하나, 철학은 하지 말라. 철학공부를 하면 자기처럼 샛길로 빠질 수도 있다.

둘, 고향을 멀리하라. 그릇에 비해 무대가 좁다. 셋, 대해(大海)로 나가라. 꿈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나는 좁은 무대에, 너무 집착한건 아닌지. 고향이 좋아. 타향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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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 진짱구 2011-02-25 10:45:48

    마지막 문장에 많은 의문이....
    큰 무대라함은 어디를? 해월선생의 말씀으로 ㅎㅎㅎ
    고향이좋아"" 타향은 싫어.. 너무조ㅎ습니다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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