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도 물에 잠겨 보이지 않고, 600년 넘은 성황당 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까지 운반하니, 마을도 계곡도 물폭탄을 맞고 피해도 엄청 컸다. 우리 마을 뒷들의 경우 100호가 넘는 집들 가운데 재드락집 몇 채를 빼고는 모두 유실되었거나 완파되고 말았다. 우리 집도 그날 바다로 떠내려갔다.
정부에서는 집이 완파되거나, 지을 능력이 못되는 가구를 최전방 철원의 민통선 안으로 유배시키는 개간식 이주정책을 단행하였다. 내가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면 철원으로 함께 갔을 것이다.
지금도 철원에 가면 울진 근남면의 이름을 따서 철원군 근남면이라는 집단 부락을 이루고, 사라호의 수재민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나도 어머님 살아생전에는 몇 번 다녀왔다. 수해나기전의 이웃사촌들이라 고향에 온 것 같고, 이지가지 봉지봉지 싸서 주는 것이 울진 풍습 그대로였다. 마을 이장도 뒷들 출신이 하고.
나들이도 군부대의 통제를 받고 있었지만 황무지를 개간하고 또 해서 다들 의식주 문제는 여유있게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어지면서는 서로 울었다. 하늘만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처마를 마주하고 고향에서 오손도손 함께 살텐데…
사라호는 나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엎친데 덮친격이다. 힘들고 바빠졌다. 주경야독(晝耕夜讀)하고, 주독야경(晝讀夜耕)도 마다할 수 없었다. 낮에도 가정교사를 하고 밤에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서울대는 나에게 아르바이트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전기도,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고향에 물난리가 났는데도, 보름이나 지나서야 소식을 전해 듣고 내려 가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더부살이할 이웃사촌 집들도 워낙 부족하니, 헛간을 개조하여 난민촌을 이루고 있었다. 눈물도 말라, 손잡고 코만 실룩 거렸다.
우리집은 초가집이지만, 금강송 재목을 써서 단단하게 지은 집이었는데 물이 불어서 추녀를 넘어서니까 둥둥 떠내려가더란다. 부서지지 않고 거실 송판마루만 남기고 모두 싣고서 바다로. 지금도 뒷들 큰댁에 가면 그때 그 송판마루가 깔려있다.
그 날이 추석날이고 낮 시간대라 마을사람들은 뒷산 기슭에 올라가 동네전체가 물에 잠기는 참경을 똑똑히 보았다 한다. 마을은 물바다요 산에는 울음바다로 곡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그 순간 내뱉은 내 어머님의 독백 한마디. “집이사 떠내려가거나 말거나 순열이 하나만 잘 되게 해주소” 모두가 탄복했단다. 이런 지극정성을 줄 수 있는 어머니가 과연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우리집안에서는 내가 내려가서야 대소간 동기들이 모여서 복구에 관한 가족회의를 열었다.
두 큰댁은 줄여서 복구하기로 하고, 우리 집은 신축을 해야 되는데 포기하기로 했다. “제수씨는 아들 따라 서울로 가시지요” 무겁게 입을 뗀 시숙들의 말에 묵묵부답이었다.
대주 잃고, 첫딸 잃고, 집마저 잃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로 가야 하는 운명의 장난 앞에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야말로 개나리 봇짐 밖에 더 쌀 물건도, 가재도구도 없었다. 아들 자취방만 믿고 서울로 떠나는 두 모자(母子)의 모습을, 심경을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때부터 집 없는(無住宅) 수재민의 여정은 한없이 계속된다. 결혼하고 내외가 맞벌이해서 집 살 때까지. 서울로 온 모자는 단칸방에서 나는 공부하고, 어머님은 바느질하시고. 어머님은 시골 계실 때 장날마다 푸성귀며 잡곡이며 팔아서 학비에 보태듯이, 한땀 한땀 삯바느질에 열중하시었다.
마침 어머님의 어진 품성에 반한 급우가 있어 어머님 손에 밥먹고 싶다고 해서 방 하나를 더 얻게 되니, 식구도 늘고, 단칸방 신세도 면하니, 사는 형편도, 분위기도 한결 좋아졌다.
어머님의 하숙생 남중구(의성 출신 경북중.고 졸업)는 훗날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논설실장이 되고, 이두호(예천 출신 용궁중을 거쳐 경북사대부고 졸업)는 보건사회부 차관을 거쳐 환경청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어머님께 세배를 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