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린시절, 어느 날 우리 꼬맹이들은 얼음을 타다가 산불을 낸 적이 있었다. 논둑에 해놓은 모닥불이 어쩌다 산으로 옮겨 붙었다. 우리는 황급히 불을 껐다. 소방도구래야 윗옷과 솔가지로 이리저리 휘두르고, 패대기치면서 불을 끄는 게 전부였다.

어찌나 정신없이 껐던지 얼굴도 시커멓고, 코도 매캐했으며, 눈썹까지 더러 하얗게 그을렸다. 손가락이 불에 데기도 했고, 윗도리는 시커먼 걸레같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그날은 바람이 불지 않아 더는 번지지 않았다. 우리는 혹시나 하여 마른 쇠똥의 잔불도 꼭꼭 밟아 없앴다. 어떤 녀석은 걱정이 되었던지 타다 남은 나무 등걸에 오줌을 갈겨 대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이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잔불정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부터 동네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산불 낸 것도 그렇지만 더구나 남의 묘 하나를 홀라당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 동네에서 누구네 묘가 탔다는 말이 있었지만 어른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지금도 어느 곳에 산불이 났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직도 그 날의 일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우리는 원자력에서 얻는 에너지를 제3의 불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제3의 불은 탄생하자마자 찬반양론의 불씨를 제공했다. 원자력에너지 찬성론자들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운운하면서 깨끗한 녹색에너지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화석연료에 비해 값싸고, 지구 온난화 주범인 탄소배출량이 거의 없다는 점, 현실적으로 전력에너지수급에 이만한 게 없다는 것 등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행복한 꿈의 에너지, 저탄소 녹색성장의 동력, 친환경 에너지는 당국이 원자력 에너지를 언급하거나 홍보할 때 즐겨 쓰는 수식어다.

그러나 원전반대론자들은 결코 값싸지 않을뿐더러 우라늄 매장량도 제한적이고, 이산화탄소 감소대신 방사성폐기물을 배출하며, 수명이 다한 원전의 폐기비용과 예측불허의 사고의 경우,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 있어 결코 값싼 에너지가 아닌 백색에너지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원전건설비용으로 대체할 에너지 개발에 전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며, 극단적으로 당장 원전을 멈추라고도 한다. 대중들에게는 원전과 관련한 객관적 정보들을 투명하게 공개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편 그간 일반대중들도 그럼 어떡하지! 당장 전기수급과 우리 일상생활은? 잠재적으로 위험이 있지만 필요악이다. 치명적이지만 매력적인에너지다. 라는 인식이 혼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민심은 조변석개라고나 할까. 이번 후꾸시마 원전사태로 말미암아 일반대중들에게 원자력 에너지야말로 인간이 결코 조절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불이라는 인식과 함께 더구나 잠재적 핵폭탄과 같아 원자력 안전신화는 허구다.’ 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 하나는 찬반을 떠나 원전의 안전성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이다. 왜냐하면 원전사고의 후폭풍인 ‘죽음의 재’라 할 수 있는 방사능 누출이 주는 불안과 공포와 그 피해가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는 산불로 낭패했던 추억이 새롭지만, 그 불은 인간이 끌 수 있는 낭만의 불이었다. 제3의 불! 이제 끌 수 없는 발등의 불이 되지 않을까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에게 꿀 바른 독과 같았던 원자력에너지! 이 위험천만한 불을 누가 끌 것인가?

불은 분명히 끌 수 있다. 그 대안 중 하나는 앞으로 원전을 확대·재생산 하지 않으려는 소방수역할을 해야 할 대안세력의 창출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 또한 대중의 엄중한 몫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제4의 불은 언제쯤 나타날 것인가? 오래된 미래는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선택만이 남았다. 위기는 곧 희망이자 기회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