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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암을 다시 부른다(2)
2011년 05월 17일 (화) 10:38:48 [조회수 : 3379] 울진신문 webmaster@uljinnews.co.kr


“철학자와 풍수가의 경계를 넘나든

울진 철학사의 비조(鼻祖)”

   
상현사(尙賢祠)는 남영번(南永蕃), 남계명(南季明),남사고(南師古) 세 유현을 배향하는 사우(祠宇)이다. 상현사를 껴안듯 감싸고 있는 산은 솔치봉의 지맥인 문필봉으로 이름난 대당산(大唐山, 일명 화산)이다.
상현사는 1864년(고종 1)에 창건 남사고를 봉안하고 화산사(花山祠)로 부르다가, 1867년에 남계명을 함께 봉안하고 양현사(兩賢祠)로 개칭했다.
1959년에 중건하면서 영양남씨 울진 입향조이자 고려조 유신(遺臣)인 남영번을 함께 봉안하고 상현사로 개칭했다.


격암 남사고의 발자취를 좆아 오르는 길은 울진 철학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격암의 족적을 찾아가는 길은 곧 울진 사상사의 연원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격암에 대한 평가는 매우 상반된 견해로 나타난다. ‘울진 철학사의 비조(鼻祖)’라는 평가와 ‘탁월한 예언가 혹은 풍수사’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전자가 주로 성리학에 기초한 울진지방을 비롯 강릉, 안동 등 지방 유림, 이른바 성리학적 지식체계를 갖춘 식자층의 평가라면, 후자는 일상적 삶을 중시하는 민중계층에서 회자되는 평가이다.

그렇다면 격암에 대한 평가는 왜 이토록 상반된 견해로 자리매김되는 것일까?
격암의 세계에 대한 지식적 사유는 유학적 체계로 분류하자면 ‘기일원론적 사유’로 귀착된다.

특히 그의 세계관은 ‘격물(格物;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찾음)’에 주목하여 철학과 과학이 어우러지는 ‘과학철학’을 구명하고자 했다. 특히 남사고는 해박한 천문 지리적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해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이해를 동시에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격암이 과학철학적 사유체계를 정립하고 이를 천착한데는 영향을 끼친 이는 강절(康節) 소옹(邵雍, 1011~1077)으로 여겨진다.

격암은 소옹의 ‘우주와 인간의 역사적 운행을 수(數)로 설명한『관물편(觀物篇)』에서 세계를 읽어내는 단초를 찾은 듯 하다.

격암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기위해서는 ‘수(數)’를 중요하게 여겼다. 사물의 복잡다단한 이치가 모두 수로 되어 있으므로 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격암의 이같은 ‘수를 중시하는 격물치지’의 사유가 일상에서 천문학적 지식으로, 혹은 이른바 풍수지리라는 인문지리학적 지식 체계로 발현된 듯하다.

이는 당시 조선사회의 지식적 본류가 주희(朱熹), 정호(程顥), 정이 의 ‘유심론적 성리학’이었음에 반해 매우 독특한 것으로 해석된다.

 

근남 수곡 누금마을서 태어나다


남사고는 1509년(중종 4)에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누금’마을에서 태어났다. 영양남씨 울진 입향조인 중랑장 남영번의 4대손이며, 만호공파의 파시조인 남호의 증손자이다. 조부는 정4품 벼슬인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낸 남구주(南九疇)이며, 부친은 이조좌랑은 지낸 남희백(南希伯)이다. 자는 경원(景元)이며 호는 격암(格菴)이다.

남사고는 관상감 천문교수로 서울에 잠시 나간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울진 근남면의 주천대(酒泉臺)와 매화리의 남수산(嵐岫山) 기슭에 기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집필활동에 전념했다. 또한 천리(天理)를 가늠하여 세상일을 예견하고, 술과 풍광을 벗 삼아 당대로부터 ‘탁월한 도학자, 해동강절(海東康節)이자 풍수에 능한 도인 또는 예언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소년시절, 금강산에서 도인을 만나 비서(秘書) 3권을 전수받다

남사고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구차하게 얻는 것보다 노력하여 이루는’ 대인적인 품성을 보였다. 황응청과 함께 길을 가다가 ‘붉은 띠로 장식된 패도(佩刀)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 일화’를 남긴 것에서도 그의 곧은 성품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소년 시절에 풍악산(楓岳山, 금강산의 가을 명칭)에 유람 갔다가 신선과 같은 스님을 만나 비서(秘書) 3권을 전수받았다고 전한다.

후에 남사고가 세인으로부터 ‘탁월한 풍수사’로 지칭 받는 계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남사고는 46세 무렵, 소수서원에 등록하기 전까지 울진에서 스스로 학문을 깨친 것으로 보인다. 남사고는 평생 “소학(小學)”을 옆에 두고 살았다. “소학”이 유교적 경전의 실천학문이라는 점에서 남사고는 도학적(道學的)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들어가 유자(儒者)의 기틀을 닦다

남사고는 울진 사람 전복룡(田伏龍)과 함께 1555년(명종 10)에 영주의 소수서원에 원생으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성리학 수학에 들어갔다. 소수서원은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사액(賜額)을 받은 영남 최고의 서원이다.

특히 소수서원의 원생으로 등록됨은 퇴계 이황과 사숙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남사고가 소수서원에 등록된 것만으로 퇴계의 문인이라고 간주하기는 어렵다. 남사고가 소수서원에서 수학한 뒤, 울진으로 돌아와 보여준 철학세계는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바탕을 둔 이기도설(二氣圖說)임에 미루어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에서 비롯하여 조광조(趙光祖), 서경덕(徐敬德), 이이(李珥)로 이어지는 기일원론(氣一原論)에 더욱 근접한 것으로 간주된다.


관상감(觀象監)을 제수받아 서울에서 하늘의 도(道)를 궁구하다

1564년(명종 19)에 종9품의 말단직인 사직참봉(社稷參奉)직을 제수받고 서울 생활에 나선다.
그의 나이 55세 때이다. 이어 1570년(선조 3)에 종6품인 관상감 천문교수직을 제수받는다. 이 무렵에 남사고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익힌 역학(易學)의 지식과 소양을 마음껏 궁리하며 자연의 이치를 궁구(窮究)한 듯하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 『완역도(玩易圖』는 천문 교수로 재직하면서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사고는 주역을 추상적 이해가 아닌, 우주적 원리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는데 전력을 다한 듯하다. 이는 당시 세계의 모순을 스스로 피하여 명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개혁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시각은 그가 지은 『해옥첨주부(海屋添籌賦)』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실제 삶은 강한 현실참여와 개혁의지에도 그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불우한 말년을 보낸다.


주천대에서 우거하며 후학을 기르다

관상감 천문교수직을 끝으로 남사고는 낙향하여 평소 즐겨 찾던 주천대와 남수산 기슭에 오두막집을 짓고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의 문인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임천(臨川) 남세영(南世英), 충효당(忠孝堂) 주경안(朱景顔 )이다. 또한 독송(獨松) 주세창(朱世昌),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는 평생 학문의 도반으로 교류했다.

또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만전당(晩全堂) 기자헌(奇自獻), 봉래(奉來) 양사언(梁士彦), 향호(香湖) 최운우(崔雲遇) 등과 활발한 학문적 교류를 펼쳤다. 봉래 양사언은 남사고의 『주역』강론을 흠모하여 그를 ‘자동선생(紫洞先生)’이라 칭하며 우러렀다.

남사고는 말년에 남수산 자락에 수십 층계로 돌을 쌓은 뒤, 그 위에 달팽이집 같은 오두막집을 짓고, 주위에 복숭아 자두나무 따위를 자유롭게 심어 가꾸었다. 남사고는 그의 유전(遺傳)을 지은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에게 자신의 만년의 운을 점친 이야기를 건네며

“강물 남쪽에 경치가 좋은데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보리라(水南山色好 歸計莫樓遲)”라며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심정을 표현했다.

남사고는 1571년(선조 4)에 세상을 마감했으니 향년 63세였다. 그의 묘소는 근남면 구산리 내성산동 뒷산 산록에 남향해 있다. 그의 부인은 강릉최씨 최침(崔琛)의 딸이며 아들 남응진(南應震)과 딸을 두었으나, 아들 대에서 후손이 끊겼으며 딸은 남백년에게 출가했다. 남사고의 직손(直孫)은 단절되었으며, 후에 그의 방손들이 ‘북평(근남면 구산1리 뒷들마을)’에 별묘를 세워 배향하다가, 계출하여 주손이 된 남우현(南禹鉉)이  1965년 구미마을 율곡에 옮겨 세웠다. <계속>


                                        /남효선 (시인·시민사회신문 전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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