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암의 학문세계는 소학(小學)에 근거한 실천철학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독보적 세계관 구축


▶又寄朱大猷 (우기주대유) - “年來無用 作田翁 虛老溪山 畝中 況復病多 愁緖積 忍看霜髮 散秋風” (요즘 쓸모없는 농사꾼 늙은이가 되어/ 깊은 산야 밭고랑 속에서 허송세월 합니다/ 거기다 병까지 겹쳐 수심만 쌓이니/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백발을 차마 볼 수가 없구려)

▶봉정동백(奉呈東伯) - “聞道烏公 鎭河陽 意將求士 薦楓宸 年來恥掃 門前地 巷里何無 乞火人” (오공이 하양에 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선비를 구하여 대궐에 천거하려는 뜻이겠지요/ 요즘은 문앞을 쓸기가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내 심정 헤아려 주는 사람이 어찌 이다지도 없습니까) # 출전, 『주세창(朱世昌), 독송유고집(獨松遺稿集)』

            
격암 남사고는 『소학』을 도학의 평생 교본으로 삼고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개혁을 꿈꾸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룰 방편을 ‘과거급제를 통한 환로 진출’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수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55세가 되어서야 ‘효행(孝行)’으로 종9품직인 사직참봉 직을 제수 받고, 6년 뒤인 1570년에 종6품인 관상감 천문교수 직에 올라 그 1년 뒤인 1571년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한다.

위의 시는 격암이 평생 ‘환로를 통한 현실 참여’를 못 이룬 비장한 심경을 담은 시 2편이다. 격암이 물질과 학문이 모두 빈궁한 벽촌인 울진에서 함께 공부한 문우인 독송(獨松) 주세창(朱世昌) 선생에게 보낸 시다.

그의 학문 세계와 그가 남긴 것으로 확인되는 저작을 검토해 본다.

『소학』의 실천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다 남사고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소학(小學)』에 근거한 실천철학이라 할 수 있다.
『소학』은 조광조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이 지(知)와 행(行)의 합일을 통해 실천궁행(實踐窮行)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 소양서로 삼은 이래, 기묘사화 이후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지향하는 사림들 사이에 널리 확산한 유교 지침서이다.

남사고는 『소학』을 평생 곁에 두고 제자들에게 소학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소학』을 중요성을 ‘많이 외우고 글을 잘 짓는 것보다는 『소학』을 일상의 홀기(笏記)처럼 여길 것’을 강조했다. 남사고의 『소학』 중시에 대해 그의 제자인 임천 남세영은 “공은 기거동작이 엄연하고 말과 웃음이 간약(簡約)하고 항상 『소학』 책 한 질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보면서 실행했다.”라고 전한다.

또 남사고의 학문 자세를 후대의 유학자 청파(靑坡) 장만시(張萬始)는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소학』의 일상 도를 몸소 체득하여 효로 연결하고, 『주역』의 예측할 수 없는 묘미를 실천하여 심신을 운용했다.

비록 달팽이 같은 집에 살았지만, 하늘과 땅 모두를 집으로 여겼다. 성(誠)과 경(敬)으로 효제(孝悌)를 수행했다. 그리하여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절차와 함께 귀신을 연구하여 조화의 묘에까지 도달한 공부가 고금에 우뚝하다. 그럼에도, 산골에 묻혀 지내 높이 발탁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남사고는 15세기 영남 유학의 거두이자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일컫는 한훤당 김굉필로부터 연원한『소학』중시 학풍의 전통을 계승하고 빈궁한 동해안으로까지 확산시켰다. 남사고가 효렴으로 추천되어 처음 벼슬길에 오른 것도 이 같은 학문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독보적 세계를 열다 남사고가 자신의 호를 ‘격암(格菴)’이라 칭한 데는 지향하는 철학의 방향의 담겨 있다. 남사고는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격(格)’자를 빌려 와서 호를 지었다고 밝혔다.

죽암(竹菴) 윤득관(尹得觀)은 『격암유록(格菴遺錄)』구서(舊序)에서 “(남사고가) 처음에는 과거공부를 하여 세상에 공헌해보려 하였으나,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대학의 격물치지라는 격자(格字)로써 자호(自號)하여 격암이라 하셨으니 여기서도 스스로 자득한 바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라며 남사고가 자호한 배경을 밝혔다.

남사고는 ‘격물’에 주목하여 철학과 과학이 어우러지는 ‘과학철학’을 구명하고자 했다. 특히 남사고는 해박한 천문 지리적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해 철학적 사유와 과학적 이해를 동시에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남사고의 이 같은 자연과학적 철학관은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린 「남명 조식의 죽음」, 「사림의 분열에 따른 붕당체제 강화」, 「기축옥사」 등의 남사고 관련 설화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또 남사고가 관상감의 천문 교수를 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사고는 천체와 자연운행에 관하여 당대 최고의 지식을 보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봉래(蓬萊) 양사언(梁士彦)과의 만남이다. 이 일화는 밀암(密菴) 이재(李栽)가 지은「남사고 유적」으로 전한다.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가 되어 남사고를 불러 함께 천지음양의 조화에 대해 논하다가 크게 감동되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절하면서 나의 스승이라 하였으며, 공을 자동선생(紫洞先生)이라 칭했다.” 또 수안 김하구(遂安 金夏九)는 「격암선생 묘갈명(格菴先生 墓碣銘)」에서 “공이 어릴 적부터 효제를 극진히 하고 언행을 조심조심하였다.

경서와 자전들을 열심히 공부하였을 뿐 아니라, 신기하고 특수한 서적들도 깊이 연구하여서 완역도를 손수 도안하여 좌우에 걸어두고 음양의 진퇴와 소장하는 원리를 관찰하였다. 격(格)자로써 초당에 이름 하여 모든 만물이 시종(始終)이 있음을 연구하였으며, 심지어 천문지리와 복서계의 신비 오묘한 경지까지 모두 정통하여서 길흉과 요상을 예언하면 그 말이 적중하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강절(康節; 중국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소옹(邵雍)의 시호(諡號))이요, 여남(汝南)의 안속(安續)’이라 칭하였다.”고 기록했다.

남사고의 뛰어남은 자연변화와 역사변화를 연계시킨 데 있다. 곧 남사고는 당시의 동양전통의 한 맥을 충실하게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16세기 조선의 정통 성리학자들이 주희(朱熹), 정호(程顥), 정이(程 )의 성리학에 파묻혀 있을 때, 남사고는 이미 ‘우주와 인간의 역사적 운행을 수(數)로 설명한’ 강절(康節) 소옹(邵雍, 1011~1077)의『관물편(觀物篇)』에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세인들이 남사고를 ‘해동강절’로 칭한 배경이다.

저작이야기 남사고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저서는 『격암유록』 『격암천자주』 『남사고비결』 『홍수지』 『마상록』등이다. 또한 심성론과 주역을 해석하기 위해 남사고 자신이 직접 그린 원리도인「이기도설(二氣圖說」과 「완역도(玩易圖)」가 있다.

남사고가 죽은 후에 그의 학설을 존중한 문인과 유림에서 그의 글들을 모아 엮은『격암일고(格菴逸稿)』와 1993년도에 울진문화원에서 『격암일고』를 번역하여 엮은 『격암선생일고역(格菴先生逸稿譯)』이 있다.

『격암일고』의 중간본 서문은 양재(陽齋) 권순명(權純命)이 썼으며, 구(舊) 서문은 죽암(竹菴) 윤득관(尹得觀)이 썼다. 『격암일고』는 부(賦) 1편과 시(詩) 4편, 서(書) 1편, 잡저(雜箸) 2편, 묘지명(墓地銘) 1편으로 구성했으며, 「격암선생유전(格菴先生遺傳)」을 비롯한 25편의 부록으로 편집했다.

『격암유록』 『격암천자주』 『남사고비결』 『홍수지』 『마상록』 등 남사고의 저서로 알려진 책 중에서 『격암천자주(格菴千字注)』를 제외하고는 모두 위서(僞書)의 흔적이 두드러져 사실상 남사고의 저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또 학계는 그중에서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이 조야한 기술(記述)의 틀을 벗어나 있고, 『남격암유록)』 『홍수지(紅袖誌)』 『마상록(馬上錄)』 등은 모두 남사고가 살고 있던 시기와는 상당히 떨어진 근세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그 진의를 더욱 더 의심케 한다.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이 책은 편년체의 예언서로서 18세기 전반에 호남지방을 비롯하여 남부지방에 널리 유행하였다. 책의 규모는 1책(冊) 4장(張)이며, 필사본(筆寫本)이다. 크기는 30cm×19.5cm이다. 남사고가 말한 비결(秘訣)을 간단히 기록했다. 이 책은 4장의 필사본으로 이 비결 아래 십승보길지지(十勝保吉之地)가 수록되어 있다.

순서는 앞에서 각 지의 길흉을 말하고 다음에 경인신묘(庚寅辛卯), 임진계사(壬辰癸巳), 갑오을미(甲午乙未), 병신정유(丙申丁酉), 무술기해(戊戌己亥), 경자신축(庚子辛丑), 임인계묘(壬寅癸卯), 갑진을사(甲辰乙巳), 병오정미(丙午丁未), 술신기요(戊申己酉), 경술신해(庚戌辛亥), 갑인을묘(甲寅乙卯) 등으로 나누어서 길흉(吉凶)을 말하였다.

그리고 십승보길지지는 소백산하(小白山下), 태백산하(太白山下), 운봉두류산하(雲峯頭流山下), 예천금강동(醴泉金堂洞), 공주마곡(公州麻谷), 영월정동(寧越正東), 무주무풍(茂朱舞豊), 부안아암(扶安壺岩), 가야산하(伽倻山下), 평평울삼(平平蔚三) 등의 장소를 열거하였다.

『이기도설(理氣圖說)』 남사고가 해석한 이기심성론의 구조를 그린 자료이다. 죽암 윤득관이 『격암선생일고』의 서문을 쓴 시기까지는 전해졌으나,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 남사고가 경세(經世)에 적용하기 위해 음과 양의 운행과 소장(消長)을 설명한 그림이다.
 
일명 「이기유행도(二氣流行圖)」로 부린 점으로 미루어 기(氣)를 음양 작용의 근원으로 설정하고 그에 따라 파생하여 나타나는 자연현상을 설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남사고의 이기도설은 ‘태극이 동하여 양(陽)을 생성하는 것’으로 파악한 퇴계 이황의「태극도설(太極圖說)」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완역도(玩易圖)』 태극의 오묘한 이치를 탐구한 그림이다. 남사고는 『완역도』를 통해 『주역』의 우주적 원리를 추상적 이해가 아닌 합리적 해석과 실용적 방안으로 모색하려는 시각을 제시했다. 실전하여 전하지 않는다. 

                                            /남효선(시인, 시민사회신문전국본부장)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