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식 주필

“이 필공(筆工)은 전주이씨 의안대군파로서 울진입향조 이제문(李制文)의 13세 손이다. 조선 고종 19년인 1882년 북면 주인2리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닦으며 섬세한 수공으로 붓을 만드니, 울진지방은 물론 영동·영남 일대에 이 필공이 만드는 붓의 우수성이 알려져 그의 명성이 자자했고, 그의 붓을 귀중품으로 소장하기도 했다.

이 필공은 1948년 영양에 사는 정씨가 찾아와 붓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 준 후 1951년 사망했다. 이에 정씨는 상경하여 인사동에서 유명했던 성문당필방(誠文堂筆房)을 운영하다가 그의 아들에게 전수시켰다.

그러나 이 고장에는 후계자 한 사람도 배출시키지 못함이 안타깝다. 이 필공의 붓은 삼통필(三筒筆), 양통필(兩筒筆)이 특히 유명하며, 오래 쓸수록 좋고, 붓털이 다 닳아도 시장에 나오는 붓 보다 좋다는 평이 있으며, 울진의 선비들이 붓 글을 잘 쓴 이유도 이 필공의 공덕인가 추측된다.”
위의 내용은 현 울진군지 하편에 딱 한사람 소개되는 장인(匠人) 편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내용을 접하면서 울진사람들도 이제는 먹고 살만하니, 울진의 과거 조상들의 족적을 더듬어 울진문화적 뿌리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문화만이 아니다. 우리가 더 잘 먹고 사는 길이 울진의 역사 속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필공이 울진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던 붓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의 순수한 제작 기술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좋은 붓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원재료를 구하기 쉬웠던 자연환경 여건과 여러 가지 인문환경 여건이 함께 어우러졌기 때문으로 울진군지에 유일한 장인, 필공(筆工) 이호익이라는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 필공의 후예를 찾아 기술을 재연해 명성을 되살릴 수 있다면, 울진의 몇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필공을 생각하다가 울진을 특화시킬 수 있는 몇 가지 소규모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다.

20여호 정도 단위 전통문화 마을을 복원하여 동호인들의 테마마을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귀농이나, 퇴직 인사들의 참가를 유도하면, 울진인구 증가책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붓 만드는 마을, 전통 울진소금을 굽는 마을, 삼을 많이 재배해 이름지어졌다는 ‘갈마제’ 마을 복원, 엑스포공원 주변에 중앙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작가 마을, 잎은 채소로도 먹을 수 있고, 줄기와 뿌리는 여성미용·건강과 질병에 좋다는 접시꽃 마을, 방사능 피폭에 강하다는 은행나무 마을 등 등…
수백억원 단위의 대형 사업들을 추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현 가능성은 떨어진다.
그렇지만 빠른 시일내에 일자리가 만들어 질 수 있고, 울진의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작은 사업들은 설령 실패하더라도 부담이 적다.

울진의 전통 소금마을을 복원하려면 시간이 없다. 그 기술을 알고 있는 단 한 분은 연세가 85세다. 다행히도 현재까지는 기억력이 또렷하다.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가까운 곳의 모든 생명체가 소멸되었을 때, 이듬해 가장 먼저 싹을 틔운 식물이 은행나무였다고 한다. 얼마 전 일본 방사능 사태 때, 방사능에 좋다는 미역과 소금이 많이 팔렸다. 은행도 생산하고, 은행을 이용한 구이, 죽 등 각종 요리를 판매하는 은행나무 마을 조성도 한 가지다.

조만간 한국문단의 거장 김주영 작가께서 울진엑스포공원 집필실에 내려오신다.
이 분의 울진 체류를 기회로 엑스포공원 인근에 작가마을을 만들어 준다면, 중앙문단 유명작가들을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접시꽃은 아욱과로 식물로서 식용이 가능하고, 동의보감에 부인병과 건강·미용에 탁월하여 버릴 것이 없는 꽃이라고 한다. 모 기초단체에서 도종환시인과 접시꽃 마을 조성사업을 구상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모시로 유명했던 안동은 요즈음 삼베의 고장으로 부상하며, 고가에 판매하고 있다.
국내는 중국산에 밀려 삼베마을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다. 아직은 울진에도 베틀에 앉자 베를 짜던 할머니 세대들이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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