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기념사>

1960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두 명의 대학생이 ‘자유를 위해 건배’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변호사 피터 베넨슨은 이듬해 ‘옵저버지’ 에 “잊혀진 수인들(The Forgotten Prisoners)” 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을 통해 베넨슨은 전 세계적으로 정부의 탄압에 의해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을 위한 활동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 글은 다른 신문들을 통해 계속 전해지게 되었고, 수 천명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함에 따라 1961년 국제 앰네스티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엠네스티는 전 세계 220만명 정도가 가입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국제 엠네스티 창시자 베넨슨이 한 말 중에서 “당신의 주장은 온당치 않지만, 당신이 주장할 권리에 대해서는 목숨을 바치겠다.” 고 했다. 이 한마디에서 그의 사상과 사회적 안목을 엿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숭고한 그의 목표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울진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으면서 과연 울진을 대표한다는 ‘울진신문’이 그동안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얼마만큼이나 군민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헌신해 왔는가를 되돌아 본다.

20년 전 울진신문은 ‘울진땅 울진사람 울진신문’ 이라는 사명감으로 못 배운자, 가난한 자, 힘이 없는 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며 창간했다. 처음에는 목표를 위해 시퍼런 펜 날을 세웠다. 단지 뉴스로서의 가치가 있느냐?  전체 울진군민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필요한가?  두 가지만을 고려했다. 그래서 울진신문의 인기는 한마디로 짱이었다.

당시에는 금력, 권력이나, 심지어 폭력에 대해서까지도 두렵지 않았다. 내가 당한들 잃을 것이 없었다. 내가 잘못되는 것은 군민을 위한 일이었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뭔가 내가 살던 주변에 기여를 하고 죽는다는 내 존재가치의 확인이었고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정론직필의 정신이 많이 약화되었다. 주변에 형성된 인간관계가 복잡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잃을 것이 많아 졌는지…. 또 입에는 밥이 들어가야 하고, 두 아들놈이 다 클 때까지 뒷바라지를 잘 하는 것도 정론직필 못지 않은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러나 울진신문의 초기 정신이 변하게 된 근저에는 ‘신문은 발행되어야 한다.’ 는 현실 절박성 때문인 지도 모른다. 신문사가 난립되니, 광고시장도 줄어들고, 독자들도 분산되다 보니, 신문사 재정능력이 빈약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울진신문의 역할이 감소된 것은 아니다. 고발성, 비판성 기사가 감소된 것뿐이지, 울진신문이 감당해야할 여론조성 기능이나, 생활정보 제공 등 영역은 무한정하다. 울진신문 창간 20주년을 맞으면서 후세들을 위한 매우 중요한 캠페인을 전개코자 한다. 문화관광부는 내년도에 전국 마을단위 도서관을 확충하고, ‘전국민 책읽기’를 국책사업으로 전개한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세계적 석학이 가장 많이 배출되는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입학에 관한 이야기다. 미국의 대학들은 우리나라처럼 학업성적 순만으로 입학생을 선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한 때 이 대학 입학생을 가장 많이 배출하던  고교는 위시콘신 주립고등학교였다고 한다.

당시 이 고교 교장은 취임하면서 2층 건물 전체를 위대한 업적이나, 인류에 크게 기여한 세계 위인들의 자서전을 비치하고,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읽도록 하여 아이들이 인생 목표를 세우도록 하고, 학교장 추천서에 학생들의 독후감을 첨부하였다는 것이다.

울진신문은 울진출신 중에서 사업계, 학계, 관계 등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사 1백인들로부터 자신의 삶의 지표가 된 책이나, 가장 감동깊게 읽은 책 한권씩을 추천받아 울진의 마을, 학교, 공공도서관에 책보내기 운동을 약 3년간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울진의 후세들이 간디의 전기를, 슈바이쳐의 전기를,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워런버핏이나 빌게이츠 전기를 읽고, 인류에 공헌한 세계적인 휴머니스트가, 과학자가, 노블리스오블리쥬를 실천에 옮기는 기업인과 인류를 구원하는 창의적인 인물이 태어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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