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년들, 부모 포켓속에 숨어 지내…보부상들의 열정 배워야"

▲ 개울을 잇는 돌다리 위에서 소설가 김주영씨는 흥이 났다. 30년 만에 다시 쓰는‘객주’10편. 작가 뒤 야트막한 고개 너머부터가 울진 보부상길 12고개의 시작이다.

<조선일보 9월 5일자 36면 특집

30년만에 속편 집필하는 까닭은?
근력 달린다고 글 못쓰진 않아
리듬·열정 되찾는 게 관건일뿐 …
작가로서의 책무도 나를 부추겨

객주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가족애 남달라 독립군에 자금 전달하듯
가족들에게 꼬박꼬박 돈 부쳐

보수·진보 갈등 어떻게 보나?
우리 사회, 네 편·내 편만 따져 범죄 저질러 놓고 정당화 부르짖어 … 강정마을 반대는
반국가적 행위 "이 개울을 건너면
울진 보부상 길, 열두 고개의 시작입니다."


칠순을 훌쩍 넘긴 소설가는 징검다리 위에서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작가의 뒤편에는 철제 비석이 서 있었다.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 조선 후기 울진과 봉화의 내성장터를 왕래하던 행상 우두머리 사내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철비(鐵碑)다. "3박 4일을 꼬박 걸어 봉화까지 60㎞를 걷는 거죠. 건장한 사내라면 이틀거리지만, 울진 특산 소금과 미역을 쪽지게에 실어 머리 위까지 얹은 보부상들 아닙니까. 무릎이 남아나질 않죠. 이 가난한 사람들, 이 팍팍한 길이 제게 다시 쓸 힘을 줬습니다."

소설가 김주영(72)이 '객주' 10권을 집필한다. 1979년부터 5년 가까이 신문에 연재했고 1984년 출판사 창비에서 총 9권으로 출간됐던 자신의 대표작 '객주'의 30년 만의 속편이다. 작가에겐 평생의 과제였지만, 아직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던 계획. 울진에서 작가를 만났다. '객주'를 계기로 시작했던 인터뷰는 작가 스스로 자신의 문학적 원형질로 명명했던 '숙명적 가난'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2011년 대한민국의 청년들과 나라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 '10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아직 평범한 사람들은 벌여 놓은 일도 정리할 나이입니다. 어떻게 결심을 하셨나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불안감이 생깁니다. 생이 끝나간다든지,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든지 하는 이유죠. 그래서 계획을 만들게 됩니다. 물론 대부분은 벼르기만 하다가 지나가죠. 사실 '객주'를 9권으로 끝냈을 때부터 늘 미련이 남았습니다. 완전한 숫자가 아니잖아요. 별렀죠. 기회가 오면, 기회가 오면. 그때 울진과 이 보부상 길이 계기를 만들어 준 겁니다."

― 처음부터 웬만하면 10권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을 텐데요.

"1979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4년 9개월 동안 신문에 매일 연재(총 1,465회)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단 한 번의 펑크나 휴식도 없었죠. 연재 막판에는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신문사에서는 세 번이나 원고료를 올려줬고, 좀 쉬었다 다시 써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어요. 정말 저도 웬만하면 10권을 채우고 싶었지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 '객주' 이후에야 조선후기 상업사를 다룬 학위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분 중에 연세대 박원선 교수님이라고 있었습니다. 보부상에 관련한 논문을 '객주' 덕분에 쓰셨다며 여러 번 고마워했죠. 자랑이 아니라 그만큼 자료나 논문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말하기 좀 민망하지만 '객주'는 상상력이 아니라, 발과 땀으로 쓴 작품이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장터에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어느 시골집에 그 지역 향토 풍속을 알려주는 군지(郡誌)가 나왔다는 얘기만 들어도 득달같이 달려갔었으니까요."

 

― 소설 객주 전집―왜 하필 지금, 울진이었나요.

"홍옥선이라고 울진 출신 산악인이 한 명 있습니다. 작년에 이 길을 제게 알려줬죠. 보부상이 걷던 길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 답사를 했어요. 보부상 대장격인 행수의 공덕을 기리는 철비(鐵碑), 주막거리, 서낭당… 놀랍더군요. 이렇게 보부상의 다양한 현장이 남아 있는 길은 전국에서 울진이 유일합니다. 자괴감을 느꼈어요. 이런 길도 모르고 '객주'를 썼다니 말이죠.

― 임광원(52) 울진군수가 '객주'의 열혈독자라던데요.

"세 번이나 읽었다더군요. 고맙게도 울진 엑스포공원 내에 있는 군수 관사를 개비해 집필실을 마련해줬습니다. 하지만 금전적 지원보다는 집필의 계기를 만들어줬다는 점이 더 고맙습니다. 올해 말로 자료조사와 답사를 끝내고 내년부터 집필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 작가의 대표작에 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걱정은 없습니까.

"연재 당시는 가장(家長)으로서 '이것 없으면 생계를 못 잇는다'는 심정으로 전력투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의 책무'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책무'라는 게 있습니다. 글은 나이가 들었다고, 근력이 달린다고 쓰지 못하는 건 아니죠. 그때 그 리듬, 그 열정을 회복할 수 있느냐는 제게 가장 큰 숙제입니다. 지금 객주 아홉 권의 요약본을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잊어버린 리듬과 열정, 어휘 등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거죠. 누워있던 기억을 일으켜서 잊었던 열정을 불사르면 스스로에게 누가 되는 작품은 안 나오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선생 세대는 가난이 보편적 경험이었지만, 특히 유난하다고 들었습니다. '탯줄을 끊으면서부터 가난에 시달렸다'고 하셨는데요.

"아버지가 없었고, 어머니는 날품팔이를 해서 먹여 살려야 했죠. 도시락은 꿈도 못 꿀 시절, 초등학교 소풍날 우리 어머니가 고구마를 보자기에 싸 줘서 도시락이라고 들려 보낸 일이 있습니다. 선생이 불러서였던가 잠깐 다녀와 보니, 고학년 형들이 그 보자기를 축구공마냥 물가 모래밭에서 발로 차고 있는 거예요. 바위 뒤에서 일본 원숭이마냥 뻘겋게 모래 묻은 고구마를 혼자 몰래 먹으며 울었습니다. 가난이 아니었으면 난 소설을 안 썼을 겁니다. 가난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듭니다. 아부하게 하죠. 난 내 힘으로 그걸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파먹으며 우리네 인생살이에 대해 써왔죠."

― 그때부터 비롯된 특유의 기벽(奇癖)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20년 동안 방이 아니라 거실에서, 그것도 불켜놓고 주무신다면서요.

"20년 훨씬 넘죠. 과장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방뿐만 아니고 어두운 곳에서는 잠을 못 잡니다. 불을 켜놔야 해요. 컴컴한 다방 같은 곳에는 안 들어갑니다. 어릴 때 나는 갇혀 살았어요. 벽장 같은데 숨어가지고 혼자 잠자고 그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말도 더듬었죠. 고치느라고 애먹었습니다. 방을 나와 거실에서 자기 시작한 것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면 죽겠다고 생각한 거죠. 내가 시골에서 무일푼으로 올라와 혼자 살아가는데, 일가친척 하나 없는 대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를 고쳐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 방을 나오셨다는 건데, 그러면 부인께서는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웃으며) 내가 결혼 이후 50년 가까이 지킨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도둑질과 사기, 이 두 가지만 빼놓고 어떻게 하든 돈을 번다. 그래서 내가 한 달에 집에 들여놔야 할 금액, 생활비는 반드시 갖다 준다. 내가 집에 잘한 건 하나도 없지만 이것만은 어겨본 일이 없습니다. 집에서는 물론 우리 집사람이 갑이고, 내가 을이죠."

― 지금 문제는 '상대적 가난'인데요. 특히 청년들의 박탈감이 큰 것 같습니다.

"객주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사기꾼도 나오고 모사꾼도 나오고, 정도(正道)를 가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모두 삶에 대한 열정은 공통적입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들이 전국을 떠돌면서 빼놓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을 부치는 거죠. 인편에 보내는 건데도 100%, 가족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마치 독립군에게 보내는 자금처럼 어김이 없어요.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죠. 청년들이 많이 힘들 겁니다. 하지만 부모의 포켓 속에 숨어서 눈치나 살피는 청년들도 많은 것 같아요. 희생정신과 가족을 생각하는 정신을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 좌·우, 보수·진보와의 갈등은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세상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겁니다. 이념의 논리로만 해석하는 거죠. 네 편이냐 내 편이냐만 따지는 세상입니다. 범죄를 저질러놓고 정당화를 부르짖는 세상이 말이 됩니까.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선거에 나오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주민들 대다수가 찬성하는 강정마을 사태나 4대강도 그래요. 내가 올해 초부터 KTV의 4대강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맡을까 말까 고민도 했죠. 그런데 내가 직접 현장을 다녀보니까 알겠어요. 특히 이번 폭우를 거치면서 수변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100% 찬성 쪽으로 돌아섰어요. 정비를 안 했으면 황폐화될 뻔한 땅이 손톱만큼도 피해가 없었거든요. 여주에서는 환경단체들이 반대 입장을 바꿔 찬성 플래카드까지 붙였더라고요. 예전에 4대강 반대하는 사람들 지금 입 꾹 다물고 있잖습니까."

― (웃으며) 너무 한나라당, 보수편만 드는 것 아닙니까.

"(정색하며) 제가 열린우리당 시절에 그 당의 공천 심사위원까지 한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강정마을 반대는 반국가적 행위예요. 나라를 수호하는 기지를 만든다는데 무슨 특별 비행기를 띄워서 막겠다니요. 나는 누구 편도 아닙니다. 양심을 갖고 하는 말이에요. 낼모레면 여든입니다. 평생 들판에서 산 사람이에요. 이 나이에 무슨 총리를 하겠습니까, 국회의원을 하겠습니까, 돈이 탐나겠습니까. 양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 어쩌면 '객주'는 30년 전의 작품입니다. 지금의 독자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선 우리 민족 특유의 근성입니다. 평창이 세 번 도전 끝에 마침내 동계올림픽을 치를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보부상의 끈기와 삶을 통해 지금 젊은이들에게 그 근성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 민족의 서정적 정서입니다. 지금 세대가 그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는 거라고 봅니다."

울진=오종찬 기자 oic1979@chosun.com


☞ 김주영은

작가는 1939년 경북 청송 진보 출신이다. 학업과 가장의 의무를 병행하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10년 만에 졸업했다.
김주영 문학의 특징은 ‘가난한 자들의 의기 투합’.
1972년 월간문학에 ‘여름사냥’으로 등단했고,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1988) ‘천둥소리’(1986) ‘홍어’(1998) 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가난한 한국인의 흥과 한을 특유의 맛깔난 토속어로 옮겼다.
대표작 ‘객주’는 유년시절 저잣거리에서 날품팔이를 했던 경험과 그때 만난 사람들의 삶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상인사회를 중심으로한 사회 변동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소설의 주인공이 왕과 양반에서 민초로 바뀌는 ‘트렌드’를 이끈 작품이기도 하다. 약 100만부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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