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진 문  논설위원
언젠가 식당에서 음식주문을 하는 데 식당 주인이 뭘 잡수실 거냐고 했다. ‘국시(국수)요’ 했더니 ‘아! 참 소면 말이지요?’ 하길래 ‘아니 국시요! 국시’ 했다. 왜 ‘국시’를 두고 소면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소면이 있으면 대면도 있는지? 글쎄, 그것도 하나의 상술인가? 예컨대 우리가 흔히 똥, 오줌이라는 말 대신 대변, 소변이라 써야 고상하고 유식한 교양인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어느 분이 원고에 똥오줌으로 써 놓았는데, 출판사에서 대소변으로 다 고쳐 놓아 항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촌놈이라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써온 국시라는 말이 더 친근하다. 울진에서는 ‘국수’를 ‘국시’‘국씨’ ‘국서’라고 한다. ‘국시 한 글시 주소!’ 얼마나 정겨운 말인가!

‘국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친근한 음식이다. 내가 으뜸으로 치는 가루음식 중 하나이다. 국시를 먹는다는 것은 장수하라는 뜻도 담겨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시집장가 갈 청춘들을 보고 ‘국시 언제 먹여 줄 건데?’ 하고 묻기도 한다. ‘국시’처럼 오래오래 백년해로 하라는 뜻이렷다. 그래서 우리네 이바지(혼례잔치)에는 ‘국시’가 단골 음식이기도 하다. 요즘도 나는 예식장에 가면 다른 음식은 몰라도 국수는 꼭 먹는다. 신랑각시 잘 살라고.

나처럼 50대 중후반이면 국시에 대한 추억이 한 둘 쯤은 있을 것이다. 소위 ‘이바지 국시’다. 이바지 때만 되면 그 동네는 온통 들뜬 분위기다. 오늘날 혼례는 예식장에서 치러지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는 집에서 치렀다. 그 날도 우리 동네에 이바지가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 갈 때부터 ‘오늘 누구네 아재 장개간다! 색종이 훔쳐 놀이하자!’ 외치며 학교 끝나고 부리나케 집으로 와 가마가 동네에 들어오길 기다린다. 가마는 대개 오후에 동네로 들어온다.

각시가 탄 가마가 동네 어귀에서 쉬는 순간 우리 꼬맹이들은 가마를 장식하고 있는 기다란 오색 색종이를 훔쳐 달아났다. 그걸 목에 걸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듯 즐거워했다. 그렇게 해도 가마꾼들은 야단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신랑 집 골목에는 짚불로 연기를 피워놓았다. 가마가 연기를 타고 넘어가야 잘 산다고 했다. 일종의 액을 물리치는 민속적 통과의례인 셈이다.

각시가 가마에서 나와 집안으로 들어갈 때쯤이면 우리는 마당에 편 멍석을 차지하여 국시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녀석은 벌써 한 그릇 게 눈 감추듯 뚝딱 하고는 넉살좋게 뒷댄(장독간이 있는 집 뒤쪽)가서 한 그릇 더 얻어와 먹는다. 나도 더 먹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그 녀석이 먹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그릇 치우러 나온 이웃 아지매가 “천수야, 니도 한 그릇 더 먹을래?” 하길래 모기만한 소리로 겨우 “네” 대답했다. 지금도 그 때의 국시 맛은 잊을 수 없다. 그뿐인가. 겨울에 우리 어머니가 해주던 칼국시 맛은 지금도 여전하다. 70년대 선생 초임시절, 장작난로에 커다란 주전자를 얹어 끓여먹던 라국시(라면+국시)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백석은 1941년 시 ‘국수’를 발표했다. 국시 가락처럼 길게 이어져온 고향의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음식 축제를 아름답게 묘사한 시였다. 백석 고향, 평안도 정주는 폭설이 내리는 겨울, 집집마다 메밀가루로 구수한 국시를 만들고, 꿩과 토끼고기를 얹어 차가운 동치미국에 말아 먹었다. 눈 내리는 밤, 국시를 이웃과 함께 먹는 겨울풍경이 너무나 정겹고 아름답다. 시 제목을 ‘국수’라 했지만, 시어(詩語)는 평안도 사투리를 그대로 써서 더욱 그렇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중략)/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의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시 ‘국수’ 중에서)

그의 시에서 ‘국시’는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민족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백석이 전 국토를 유랑하면서 우리 음식물에 대한 시를 쓴 것은 바로 이런 데 있었다.
독자 여러분! 임진년 새해, 동치미 곁들인 국시 한 글시 꺼떡 잡수시고, 枯淡하고 素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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