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초령을 굽이굽이 오르니 저 아래 갈면 주막거리였던 동막마을과 갈면 저수지가 보인다. 매화장에서 동막까지 20여리, 옛보부상이나 행인들은 매화장터에서 지붐(기양리)을 지나 북다골냇가(현 갈면 저수지)를 거슬러 동막주막거리에서 한차례 쉬었으리라! 아직도 고초령을 지나 영양 수하 깊으내(심천)까지는 30여리, 시간상으로 너댓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다. 물론 옛보부상의 상행위는 동해안의 매화,동정,덕신,오산,장평(노음),울진,죽변,흥부,망양,기성,후리포와 내륙의 산간오지인 왕피천 원류를 따라 오가며 수하,수비,송방,오무, 영양장 등지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동서를 넘나들며 해산물과 농산물을 유통시키고, 그와 함께 소위 사발통문을 전달하는 소식통 노릇을 했음직하다.
임도가 갈라지는 세 갈래 길, 이정표가 일행을 안내한다. 우리가 올라온 동쪽의 갈면리,서북쪽의 왕피리,서남쪽의 영양 송방이다. 물론 우리 목적지는 영양 송방쪽이다. 드디어 굽이굽이 재 넘고 산길을 걸어 울진과 영양 군계인 깊으내(深川)에 다달았다. 보부상들과 길손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막걸리로 땀을 식히던 곳! 깊으내 건너기전 마지막 주막이 있던 곳! 주막은 흔적 없고, 무상한 세월! 하얀 망초꽃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일행을 맞아준다. 깊으내를 건너면 우리나라에서 산간오지중의 하나인 송방,오무마을도 바로 지척이다.
어느 길이든지 그 길에는 민초들의 애환과 역사와 전설이 있다. 고초령이라고 이야기가 없을까? 예닐곱이 풍우를 피할 수 있는 널따란 바위가 지붕처럼 덮여 있는 바위굴, 일명 도적(도둑)바위는 장꾼이나 길손들의 금품을 갈취한 무뢰한들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길손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한 길가의 돌무더기, 금강소나무에도 빗살이 그어진 아픈 상처는 인간의 송진 수탈행위를 그대로 보여준다. 더욱이 이 날, 일행의 길잡이를 해준 박무근(72세 원남 갈면리)옹은 고초령 마을에서 태어나 이태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고초령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박옹이 들려준 6.25한국전쟁 전후 당시, 고초령 주민들이 겪은 애환은 그대로 우리의 현대사였다. 고초령의 자연부락인 반정, 높을마을, 독점, 사기막, 갈밭메기 등 마을, 그저 땅이나 일구며 오순도순 정겹게 살던 이곳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좌우익의 정치 이념, 그리고 전쟁과 평화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케 한다.
나는 고초령을 넘으면서 『길들은 진화와 퇴화를 반복하며 서로 만난다. 길끼리 만나지 않는 길은 존재할 수 없다. 길 중에, 섬(島)인 길은 없다.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라는 어느 시인의 에세이집에 나오는 말을 떠 올렸다. 그래서 감히 그 시인의 글귀를 제목으로 붙였다. 큰길! 작은 길! 구불구불 곡선 옛길, 곧고 매끈한 직선의 고속 길! 사람의 길, 산짐승의 길, 물길, 하늘 길, 민초들의 애환과 전설과 역사가 서린 길, 길 위의 인생, 보부상 길, 그래서 모든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라고 했던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는 길,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길, 우리의 일가친척, 고초령 옛길! 보전의 가치가 큰 아름다운 길이다. 독자들이여! 권하노니 올 여름, 고초령을 한번 넘어보라. 그래서 길과 사람이 정겨운 일가친척이 되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