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후 연호는 더욱 생기발랄하다. 연잎에 알알이 맺힌 수정보석들, 폭염에도 녹지 않는다.  수양버들은 휘휘 늘어졌다. 오랜만에 연호정의 기와 끝 하늘이 세수한 듯 파랗다. 연호둘레가 녹색정원으로 한 철을 녹음방초하며 지나고 있다. 연못생태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연호는 그야말로 온갖 수서곤충과 조류, 식물들이 번성을 구가하고 있다. 언제 새끼를 쳤는지 오리엄마 따라 새끼 오리궁데이들, 느릿느릿 산책로 따라 걷더니 우거진 연잎 속으로 사라진다.

논병아리도 덩달아 푸드득한다. 진한 자주색에 금빛 날개를 희번득이는 새 한 마리, 물총새가 앞산 쪽에서 물총 쏘듯 재빠르게 부들 우거진 곳으로 날아든다. 붕어가 떼 지어 물길 따라 논물 흐르는 입구로 모여든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물장군과 게아재비가 잠깐 얼굴을 보이고는 자맥질로 사라진다. 폭염에 개구리들도 연잎에 몸을 숨기고 할딱인다. 물잠자리들의 날개가 망사처럼 더욱 얇아져 더욱 하늘거린다. 여름이 가고 있다.

인간은 아직 철들지 못해 조금만 더워도 덮네, 춥다했지만, 자연은 평등하게 오고 가는 것, 철이 든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시원하다. 연호정 솔잎들이 폭염에도 제법 까실하고 뾰쪽해졌다. 나이테도 더 단단해 가리라. 가을이 온다. 기후 변화로 우리나라 특유의 기상현상인 겨울철 삼한사온이 사라진지 오래고, 여름엔 뭉게구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서쪽하늘에 제법 뭉글뭉글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곧 노을이 질모양이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온다. 읍내 아파트에 불빛이 비친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조금 있으면 사람들이 산책을 나오는 저녁시간이다. 시골에 살면서도 하늘 한번 제대로 감상하기 바쁜 일상이다. 연호가 의자에 앉아 새삼 하루를 둘러본다. 

연꽃하면 불교의 상징이니, 이제염오(離諸染汚)니, 불여악구(不與惡俱)와 계향충만(戒香充滿) 이니 하는 사자성어와 인간존재의 뜻을 꽃에 비유하여 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 김춘수의<꽃>과 김소월의 산유화는 어른이 되면서 얻은 지식적인 관념일 뿐이다. 굳어진 관념은 때로는 불융통과 불소통을 낳는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보다 사물을 처음 대하는 순간의 감성이 더욱 오래 기억된다. 그래서 연호와 연꽃은 내게 추억이다.

어릴 적 어머니 따라 울진시장에 왔다가 처음 본 연호는 정말 커다란 연못 그 자체였다. 연잎을 보는 순간 세상에 이렇게 큰 풀이파리도 있나 싶었다. 나는 그때 까지만 해도 배추 잎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둥근 연잎은 사람이 올라타도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녹색의 정원에 핀 연분홍빛덩어리는 마치 여름밤 시골저녁을 밝혀주는 듯한 남포불이었다. 연잎을 비올 때 우산삼아 쓴다는 것과 연꽃 씨알을 먹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게 연밥이라는 것도. 또한 정자라면 으레 바닷가에 있고, 망양정만이 제일 큰 기와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읍내 가까이 이런 큰 정자가 있다는 것도 참 놀라웠다. 벌써 4,50년이 지난 무지의 소치인 올챙이 어린 시절 감성이었음을 지금 새삼 느낀다.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순수한  동심의 추억을 간직하고서 이제 50대 후반이 지나 연호가에 살고 있다. 정말 커다란 연못이 있는 정원을 눈앞에 두고 즐기고 있다. 하지만 나만의 정원이 아니라 후세에도 길이 보전해야 할 울진읍민들의 소중한 쉼터이기도 하다.
 
연호정은 문헌상 처음 이름이 향원정(香遠亭)이라 했다가 그 뒤 연호정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향원정,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뜻인데 새삼 연호 둘레의 솔 향과 연꽃의 자태가 살아나고, 더구나 올해는 연꽃이 제법 많이 피어서 연호가 오랜만에 향원정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해도 연호에는 연꽃이 사라질 뻔 했다. 각종 수생식물이 연호를 거의 잠식해 연잎이 제대로 번성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년간 울진읍청년회원들의 열성적인 연호 살리기 운동으로 이제 호반에는 연잎으로 가득 채워지고, 온갖 생명들이 살아나 더욱 운치롭다. 새삼 울진읍청년회에 칭송의 박수를 보낸다. 하나 바람이 있다면 연호둘레에는 겨울철새들의 집이 되도록 약간의 키 큰 부들이나 줄, 갈대 따위의 수생식물들은 일부 살려두었으면 하다. 내년에도 울진읍청년들의 그 열성과 칭송의 박수만큼이나 큰 연꽃봉오리가 다시 가득하고, 겨울에는 하얀 고니가 날아오는 연호를 그려본다.  연호, 다시 살아나 꽃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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