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

                 만우스님
 “더럽게 살자”라는 책이 나온 지는 벌써 15년을 헤아린다. 환경운동가 유영초 씨의 환경에세이이다. 필자와는 한 환경운동단체에서 같이 일했던 인연이 있다. 그것은 지극히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이의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기억은 가물거리지만 그 책 제목만큼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그 책을 읽지 못했으니 과연 내가 더럽게 살 자격이 있는지나 모르겠다.

지난 겨울에 보부천 골짜기에 살면서 진짜로 더럽게 살 수밖에 없었다. 욕실이나 난방, 수도 같은 현대문명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으니 자연의 질서에 그대로 따라야만 했고, 차도 들어가지 않아 발품과 지게질로 의식주를 해결했다.
 
물과 방을 데우고 밥을 짓는 유일한 방법은 나무를 때는 일이었으니 몸과 옷에서 화덕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물론 스스로는 잘 모르지만 어쩌다 읍내 장을 보러갈라치면, 그래도 나이 드신 분들은 별 내색이 없지만, 젊은 사람들은 코부터 쥐었다. 

그런 형국이었으니 유난히 추웠던 겨울에 따뜻한 물도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목욕을 한다는 일은 무척 성가시고 귀찮은 행사였다. 어쩌다 읍내에 나와 목욕탕 가는 정도였으니 목욕이 아니라 몸 빨래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보통 일주일 정도는 목욕은커녕 머리도 감지 않고 지내는 일이 다반사였고 심할 때는 보름이 가는 경우도 있었다. 턱에 수염은 부수수했다. 삭발을 한 머리 위에서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뻗쳐서 자랐다. 

먹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거지는 따뜻한 날을 잡아 어쩌다 하는 행사였다. 발우공양을 하듯이 먹고 난 그릇에 물을 부어 김치 한 조각으로 싹 닦고 상 위에 그대로 엎어놓으면 끝. 이 역시 매일, 끼니때마다 설거지를 한다는 게 귀찮다는 핑계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청정한 자연환경의 혜택을 입었는지 가렵다거나 더럽다거나 위생적으로 해롭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산으로 계곡으로 뛰어다니는 것으로 놀이를 삼고, 나무를 하고 길을 정비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니 속세에서 살 때보다 더 건강하게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고뿔을 앓거나 몸에 병이 나는 일도 없었다.

사실 요즘 도시인들은 너무 깨끗하게 산다. 겨울에도 매일 향기가 좋고 부드러운 거품이 나는 비누로 따뜻한 물을 펑펑 써가며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그렇게 몸을 씻고 향수나 화장품으로 몸을 감싸지 않으면 비위생적이며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 광고 역시 그 제품을 쓰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큰 병에 걸릴 것처럼, 또는 그 제품을 써야만 깨끗해진다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협박을 하고 유혹을 한다.

그렇게 보면 ‘지나치게 깨끗하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 보다는 사회체제가 그렇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즉 하나의 문화현상이며 경제논리이지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의사들도 그러지 않는가. 때는 또 하나의 피부라고. 그래서 가볍게 샤워는 할지언정 이태리타월로 박박 벗겨내지는 말라고. 때가 있어 피부가 보호를 받는데 그걸 다 밀어내니 다른 대안이 필요할 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바르는 로션이나 화장품들이 우리가 더럽게 여기는 돼지기름이나 그런 것들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허위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절감할 것이다. 아니면 이 세상이 하도 (정신적으로) 더럽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역설적으로 몸의 깨끗함으로 위로를 받으려는 것일까? 

굳이 이 자리에서 환경오염문제나 물부족국가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조금은 더럽게 살자’고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강요해야 한다. 아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몸을 조금 더럽게 하는 일은 오히려 마음을 더욱 깨끗하게 하고 이 우주를 빛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지난겨울의 그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통해 알게 되었다. 유영초 씨를 직접 만나기는 어렵더라도 책은 꼭 구해서 하루빨리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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