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얼마 전, 미녀 탤런트 김태희씨가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던 SBS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장희빈이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아 마시면서 막을 내렸다. 장희빈이 죽기 두 해 전 이맘 때, 그러니까 1689년 음력 6월 8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고 사망한다.

우암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기 때문에 大君을 생산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장옥정이 낳은 아들(후에 경종)이 세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그 후 상황은 더욱 확산되어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노론이 몰락 지경에 이르면서 마침내 우암에게 사약이 내려진다.

때는 장마철이라 발목이 빠지도록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상경하다가 전라도 정읍에서 어명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앞두고 우암은 제자들에게 유언을 하면서 매우 특이한 당부를 하였는데, ‘나의 관(棺)은 이어붙인 판자로 만들라’였다. 살아서 임금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고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천 번이나 등장한다는 우암이, 황장목 통관이 아니라 덧댄 널판(附板)으로 관(棺)을 만들라 했다니 무슨 까닭일까.

1970년대 초반까지 서울 안국동에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노론계 후손들이 이용하는 다방과 남인 소론계 후손들이 드나드는 다방이 따로 있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당쟁의 여파는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특히 숙종代를 거치면서 당쟁은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았다. 그러한 당쟁의 중심에는 항상 우암이 논의되고 있었다. 정조代에 이르러서는 논쟁을 종식코자 우암의 성씨에 성현에게나 부여되는 ‘子’를 붙여 ‘宋子’라 일컫고,『宋子大全』을 간행하게 된다.

또 정조는 여주에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해 ‘大老祠’를 지어 사액(賜額)하는데, 大老란 말 그대로 ‘큰 어른’이란 뜻이다. 후일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 과정에서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大老祠’를 철폐는 못하고 ‘江漢祠’로 개명하게 되는데 ‘漢’이라는 글자에는 ‘놈’이라는 의미도 있다.

울진에서는 안동문화권과 가까운 옛 평해군 지역에서는 우암이 별로 대우받지 못하였지만, 강릉과 강원도 영향권에 속한 곳에서는 우암을 존경하는 집안이 많았다. 그래서인지『조선환여승람』울진군편에도 우암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금강송의 고장, 황장목 주 생산지인 울진에서도 존경받았던 우암은 왜 자신의 관을 이어붙인 널판으로 만들게 했을까. 정다산(丁若鏞)의  詩文에는 ‘황장목 한 그루 값이 천금이라네(黃腸一樹値千錢)’라고 했는데, 평생 무명으로 만든 조복(朝服)을 입었을 정도로 검소했던 우암이기에 비싼 황장목을 쓰지 못하게 했을까.

그 답은 우암이 섬기던 임금, 효종의 재궁(梓宮: 임금의 棺)에 덧댄 황장목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일찍이 세종代부터 조정에 장생전(長生殿)을 설치해두고 황장목을 비축하여 언제 생길지 모를 국상에 미리 대비해왔는데, 효종의 국상을 맞은 장생전에는 더 이상 쓸 만한 황장목이 없었다. 넓이는 물론이고 길이도 부족한 널빤지만 나온 것이다. 여염집도 아니고 대왕의 재궁에 附板이라니, 효종으로부터 代를 이은 현종의 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계 김장생에게서 예(禮)를 배워 조정에 들어선 송시열. 하필 그때 국상의식을 담당하고 있었고, 쏟아지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시열이 禮를 안다고 자처하면서 君父의 喪에 일찍이 전고에 없었던 덧댄 널판으로 된 재궁을 써가면서까지 자기 실정이 탄로날까봐 숨겼다.”고 욕을 먹고, “그런 자를 30년씩이나 큰 벼슬을 주어 그의 말대로만 따랐으니, 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우암으로서는 차마 황장목 棺을 쓸 수 없었으리라.
                                                                                           /임명룡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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