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식 주필

 

               전병식 주필

“하늘의 선녀가 몇 년마다 한번씩 이 땅에 내려오나요?”

본사는 약 1년전부터 두 달 마다 한번씩 독자와 군민 참가자들을 모집하여 ‘길따라 맛따라 1일 트레킹’을 떠나고 있다. 내가 인사말을 할 때 서두에 상투적으로 꺼내는 말이다. 참가자들 약 1/3이 단골 손님이다보니 이미 빙그래 웃는 분들이 많다.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젊은 날 철학도 같은 한 친구로부터 ‘불교의 인연설’ 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마어마한 시공적 이야기라 지금도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그때 크게 공감했다.

전생에 5백겁의 인연이 있어야 이승에서 한번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1겁의 시간이란, 하늘에 살고 있는 선녀가 1천년에 한 번 목욕하러 내려오는데, 선녀가 목욕을 하기위해 잠자리 옷을 벗고 입을 때, 옷깃에 스쳐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한 겁이라고 한다니...

언젠가는 이러한 이야기가 불경에 있는 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 5백겁의 인연이 있어야 이승에서 한 번 만나게 된다면, 부부가 되고, 아비가 되고, 가족이 되는 인연은 전생에 얼마나 오랜 겁의 업이 있어야 할까!

여하간 같은 버스를 타고 하루를 동행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인연이니, 자신과 동행자의 삶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매번 똑같이 되풀이함으로서 사람들은 내가 한 마리 앵무새인 것을 알고서는 웃는다.


지난번 여행에는 처음으로 전문 MC를 초청하였더니, 그는 참가자들을 소개시키면서 일일이 “왜, 사는가?” 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힐 것을 강요(?)했다. 왜 사는가?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다.

우리가 왜 살까? 나는 왜 살까? 아직까지 이 화두에 대해 누구나 공감할 명쾌한 답변을 준 사람은 없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한다. 인류사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깊이 고민한 분들은 예수와 석가 같은 분들이 아니었겠나.

그 분들이 출발하는 입장은 다르다. 석가는 자신에게 주어질 왕위를 버리면서까지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궁구했다. 대신 예수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자신의 의지로서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분 다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심을 가졌다고 본다.

좀 더 추가해야할 분들이 있다면, 공자나 소크라테스 정도가 아닐까. 그분들도 인간에 대해 고민을 좀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쩍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데, 이 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 할까를 생각하니 두 분은 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왜 사는가? 이 문제에 아직까지 나를 가장 크게 설득하고 있는 사람은 실망스럽게도 독일의 니힐리스트 철학자 쇼펜하워다. 내가 알기로 그는 ‘의지로서의 표상’ 이라는 책을 통해서 인생을 ‘맹목’ 이라고 갈파했다.

실망스럽더라도 할 수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그야말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왜 사는지? 를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약 2백년 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금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를 알아 맞췄으니 놀라울 뿐이다. 그냥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거고, 숨을 쉬고 있으니까 사는 겐가.

내가 지금 심한 독단에 빠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쇼펜하워, 그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는 벗어나있다 할지라도 그를 통하면, 인생이 무엇인지를 찾아나설 길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길을 가르쳐 주었다면 何汝問議棲僻山(하여문의서벽산)이요. 그 다음은 본인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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