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임명룡 집필위원
70년대 울진 꼬마가 산골에서 겪은 콩쿨대회에서는 ‘옥쟁반 은구슬’이 사회자의 전유물이었다.

여자 출연자가 노래를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갈 때마다 꾀꼬리요, 은구슬 옥구슬인데 ‘은’이 쟁반이 되었다가 구슬이 되기도 하고, ‘옥’이 구슬이었다가 쟁반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꾀꼬리와 은과 옥이 번갈아가며 역할을 달리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추석날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풍경이 ‘콩쿨대회’다. 산골에 골골마다 스며든 이름도 예쁜 마을들이 추석날 저녁에 한 데 모여 펼치는 가을축제. 그 외딴 산골 공터에 한꺼번에 오륙백 명씩이나 모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숫자에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콩쿨대회가 대단한 축제였던 것 같다. 명절에 여러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술에 취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이 마을 저 마을 젊은이들이 세력을 과시하기도 하고 가끔씩 호기를 부리는 술꾼에 의해 사회자의 마이크가 사라지기도 하던 그 노래자랑 대회가 너무도 그리울 때가 있다.

내가 남들에게 크게 내세울 만한 재주는 못되더라도 한문 글줄이나마 읽도록 만들어준 은사님들 중에는 한시(漢詩)의 대가이신 심용호 명예교수님도 계신다.

선생께서는 대학 강단에서 정년퇴임하시고 지금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시 특강을 맡고 계시지만,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는 초등학교였다고 한다. 사범학교를 마치고 처음으로 선생님이 되었을 때가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나.

아이들을 다루는 게 하도 서툴러 교장선생님께 꽤나 혼났는데, 선생께서 다시 사범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마치고 이번엔 어느 시골 읍내 상업고등학교 한문 선생님으로 교단을 다시 밟게 된다. ‘옥쟁반 은구슬’ 얘기는 그 시절에 생겨난 에피소드이다.

60년대 중반부터 대한민국에는 이른바 ‘콩쿨대회’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고, 선생께서 살던 읍내에서도 콩쿨대회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노래자랑 대회가 대체로 그렇듯이 심사위원 자리에는 그 마을의 최고 지식인(?)들이 앉게 되는데, 주최 측에서는 읍내에서 가장 높은 학교인 상업고등학교에 심사위원장님을 요청을 한 것이다.

그 시절 상업학교에는 음악선생님이 따로 없었던 터라 선생님들끼리 서로 미루다가, ‘그래도 국민학교 선생을 했으니 풍금이라도 만져본 네가 낫다’해서 20대 중반에 콩쿨대회 심사위원장 자리를 앉게 되었다고 한다.

노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백치인 선생께서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최종 심사평을 하게 되는데, 잘하는 거라곤 한문 구절뿐이라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비파행(琵琶行)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콩쿨대회 최우수상 수상자를 칭송하니 그게 바로 ‘옥쟁반 은구슬論’이었다.

“최우수상 수상자께서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마치, 크고 작은 은구슬이 옥쟁반을 구르듯(大珠小珠落玉盤) 노래가 아름다웠습니다.” 당시 전국 콩쿨대회 가운데서 최우수 심사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지 아마.

가을 이맘때 마음은 고향으로 간다. 산골에서 객지로 떠나온 사람들은 몸이 고향을 찾아도 마땅히 묵을 데가 없어 마음만 간다. 모텔이나 여관은 전부 바닷가에 있다. 70년대 콩쿨대회가 열리던 곳에 여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시절에 모였던 오륙백 명 중에 묵을 곳이 없어 고향을 자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일이백은 남아있지 않을까. 그들을 상대로 운영하면 여관 운영이 불가능할까....... 그 여관 지하에는 노래방이 달렸으면 좋겠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모여 탬버린을 옥쟁반삼아 두드리고 싶다.

“아, 콩쿨대회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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