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 (시인, 서울 출향인) -

                       전세중
가을철이면 사람들은 자주 산을 찾는다. 단풍의 절정을 보기 위해서다. 무엇이든 절정은 아름답다. 단풍잎들을 보니 어릴 적 들판에 출렁이는 논두렁 생각이 난다.

누런 벼이삭 사이로 메뚜기가 날아다니고, 참새들이 숨바꼭질을 하듯 먹이를 찾아 기웃거린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에 반사된 햇빛이 눈부시다. 잠자리는 꼬리를 물고 그 위를 맴돈다.

햇살이 눈부신 가을날 뒷뜰 마루에 걸터앉아 감나무에 달린 감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익은 홍시가 가지 끝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었다. 한 잎, 두 잎 감나무 잎이 춤추듯 떨어지고, 깊어가는 가을 사위가 고요하다. 짙은 적막감이 엄습하여 탈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산하는 쓸쓸이 물들고 땅에 떨어진 마른 나뭇잎들은 바람에 서걱거린다. 어둑한 하늘에서는 큰 기러기 때가 무리지어 날아간다. 곡선으로 휘어진 머리와 긴 목이 검은색 판화처럼 하늘을 수놓는다.

외로운 갈대들이 서로 부대끼며 지나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달랜다. 바람이 불때마다 서로를 애타게 부른다. 문득 등굣길의 코스모스를 떠올리며 내 어린 날을 추억해본다. 여린 코스모스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듯하였다. 그 것은 까까머리에 보자기를 둘러맨 나의 모습과 닮았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는 깊어가는 밤을 더 재촉한다. 그들도 갈 길이 바쁜 모양이다.

가을은 빛의 계절이다. 따사로운 빛은 모든 것을 붉게 한다. 붉은 단풍잎은 최후를 불사르는 의지의 표현이다.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빨간 피처럼 역동적이고 따뜻하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낙엽이 뒹굴 때 나는 오히려 생生의 갈증을 느낀다. 억만년의 고난과 역경을 거쳐 생명으로 탄생한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붉은 가을은 아름답다. 힘겨운 겨울을 이겨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은유의 가을 들녘에 앉아 지는 해의 장엄함에 도취한다. 가을의 쓸쓸함도 다가오는 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지도 모른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시린 바람은 나를 움츠리게 하지만, 마음 한 구석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일어난다.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를 나에게 준다. 저무는 가을들녘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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