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명룡 집필위원 -

               임명룡
연말이 되면 한 해 동안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말들을 몇 가지 추려서 그해의 화두로 매김하는데 올해는 그 안에 ‘잉여’라는 용어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듯하다.

‘잉여(剩餘)’는 사전적 의미로 ‘다 쓰고 남은 것’을 의미하는데,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할 일이 없고 학교 역사시간에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으로 발생하는 ‘잉여 생산물’을 설명할 때 가끔 나타나는 용어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 단어가 ‘인간’ 앞에 붙어서 ‘잉여 인간’이라는 속어로 활용되고 있다. 세상에! 다 쓰고 남은 인간이라니.......

독립영화를 좋아해서 가끔 극장에 가서 관람하기도 하는데, 지난 일요일 저녁에는 <잉투기>라는 영화를 보러 상영관을 찾았다. 서울에서도 독립영화 상영관은 흔치 않아서 시내 중심가로 한참이나 들어가야 하고,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독립영화를 겨울비까지 맞아가며 굳이 식구들을 끌고 간다고 아내는 투덜거렸다. 영화가 끝나고 아내의 눈언저리가 붉어 있었다.

그날 오전에 우리 부부는 김장김치를 담갔다. 예년보다 배추농사가 잘 돼서 배추 크기가 크진 탓인지 평년과 같은 포기 수를 담갔는데도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김치가 남았다. 김장의 ‘잉여’가 발생했다.

최근 한국 인문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강신주 박사는 남는(剩餘) 음식이 분배되지 않는 까닭이 냉장고 때문이며,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고 했다. 하물며 우리의 김장김치는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으니 분배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누구를 줄까 하다가, 가까이서 혼자 자취하고 있는 옛날 제자가 생각나서 그 아이에게 주기로 했다. 서른 살 쯤 되는 아가씨다. 부모님 이혼으로 중학생 때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최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취방을 구해 이사를 한 곳이 우연하게도 우리 동네였다.

낮에는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밤에는 남자친구가 운영하는 실내포장마차에서 잔일을 돕는다. 김장김치를 주겠다고 전화를 했더니 한사코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울먹이는 목소리고 “잘 먹겠습니다.”한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김치통을 넘겨주었더니, 손으로 써서 곱게 접은 편지를 우리 부부에게 한 통씩 내민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편지를 뜯어 읽어보니 ‘성공해서 선생님께 짠!!하고 나타나고 싶었었는데, 그래서 선생님이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고, 그래도 가까이 살아서 자주 뵙게 되어 속으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고.......’ 그 때문에 아이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어설픈 어리광을 부리며 유난히 밝은 체 했나싶다. 방황하던 사춘기 때 머리 몇 번 쓰다듬어주었을 뿐인데.

영화 <잉투기>는 얼핏 ‘잉여인간들의 격투기’를 줄인 말 같지만, 소제목이 ‘ING+격투기 = 우리는 싸우고 있다!’ 인 것처럼 이 사회 속에서 ‘쓸모없어 남은 인간’이 아니라 써먹히는 인간이고자 처절히 싸우고 있는(ING) 청춘들의 아픈 이야기다. 지금 우리 청춘들은 아프다. 대학을 가야 할 때도 아프고, 대학을 졸업해도 더 아프다. 입시전쟁 취업전쟁 이런 전쟁은 적이 동료라서 더 잔혹하다. <잉투기>는 그 전쟁에 참여조차 못한 청춘들의 이야기다.

김장김치를 받아가던 아이의 모습이 영화 속 여학생 얼굴과 겹친다. 그 아이도 참 예쁘고 똑똑했다. 싸움도 잘해서 혼자서 전교생을 왕따시키기도 했다. 영화 속 여학생이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배경음악으로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지금 이 나라 기득권 세대인 386, 486세대들이 학창시절 교정에서 자주 불렀던 상쾌하고 경쾌한 가요다.

 ‘라일락 꽃 향기 흩날리던 교정’ 은 그대로인데, 그 안의 청춘은 처절하게 달라졌다. <잉투기>감독은 어떤 의미로 그 밝은 노래를 그토록 슬픈 장면과 대비시켰는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을 아프게 하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지금 기득권자이자 그들의 부모세대인 386, 486 바로 당신들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잉여가 지니는 본래의 가치 즉, 분배 원리와 교환 원칙을 무시하고 기득권 냉장고에 채워넣기만 하는 자들이 진정한 잉여인간, 그게 바로 386, 486 우리들이라는 생각에 그깟 김장 몇 포기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하던 아이에게 미안하고....... 이 시대 아픈 청춘들에게도 너무 미안해서 자꾸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내도 그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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