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농모 배동분의 에세이로 쓰는 유럽연수기 (3)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지역에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멀고 먼 이탈리아까지 와서야 깨달았으니 딱한 일이었다.”

 

여행과 연수는 엇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이 둘 모두는 내 울타리로부터 훌쩍 떠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여행은 내 안의 찌꺼기, 울화통, 화, 삶에서 부딪히는 군상 등을 옷을 세탁하기 전 주머니를 뒤집어 털어내듯 탈탈 털고 오는 거라면, 연수는 정반대로 무언가를 잔뜩 끌어안고 와야 한다는 점에서는 판이하다.

즉, 여행은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듯 내 안의 구석지고 암울한 것들을 다 끌어내어 나를 비우는 일이라면, 연수는 가슴에 훈장을 덕지덕지 붙인 참전용사처럼 연수지에서 무엇 하나라도 건져서 주렁주렁 달고 들어와야 한다. 그러니 늘 부담감이 껌딱지 처럼 붙어다닌다.

그래서일까. 연수 초장에 그만 병이 나고 말았다. 인천공항에서 프라크푸르트까지 13시간을 가는 것도 모자라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볼로냐까지 1시간 반을 더 비행해서 이탈리아에 도착하다보니, 그 피로감으로부터 기인한 병인 줄 알았다.

물론 오랜 비행과 8시간이라는 시차가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지만, 이 난데 없는 병은 부담감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맞았다.

연수 3일차인데 하루하루 오감으로 느껴지는 나라 밖의 배울 거리에 그만 욕심이 앞섰던 것이다. 저장할 배를 생각지 않고 울진으로 돌아가면 다 써먹을 수 있을 거야 하며 꾸역꾸역 다 우겨넣으려고 했으니, ‘원기탱천’ 함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몸이 신호를 보낸 것이다.

어쨌거나 몸에 나타나는 이상 반응을 연수팀에게 티도 내지 않고, 중무장했던 마음을 조금 풀고 전투태세(?)를 재정비하면서 눈꼽 만큼도 전의를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암시를 했다.

왜냐 하면 오늘부터의 방문지는 세계인을 좌지우지하는 ‘명품 농산물 가공’ 에 관한 것이라 정수리를 누르는 부담감은 이명처럼 들리는 내 안의 자기암시 효과로 뽕맞은 사람처럼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울진 역시 타 군에서 명함을 내밀 수 없는 농산물, 특산물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이탈리아의 명품농산물 가공과 어떻게 접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하늘을 찔렀다.

이탈리아 연수의 큰 축 중 하나인 협동조합에 대해 레가코프 모데나(Lagacoop Modena) 를 방문하여 배웠고, 그 배운 것을 직접 체득하기 위해 빌란차이 저울 협동조합과 저울 박물관을 연달아 방문했다.

귀로 배운 것을 눈과 촉으로 경험까지 하는 것이 이번 연수의 특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연수자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풀어낼 이야기는 연수의 또 다른 큰 축인 가공식품, 즉 발효가공 농산물의 명품화 사례에 관한 것이다.

앞의 연재에서 말했듯이 먼저 모데나 대표 지역 특산물 연합회를 방문하여 치즈, 와인, 발사믹 식초 등 특산물 연합회 대표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그들의 자부심을 보며, 그 뒤에 숨어 있는 명품의 숨결을 요즘 애들 말로 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농장 하나하나를 방문하여 현장에서 배울 차례다.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람브로스코 와이너리 협동조합이었다. 내가 와이너리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호주 등 해외여행을 나섰을 때 자주 현지의 와이너리를 방문했었다.

호주 역시 와인 수출로 보면 세계 4위 정도를 차지하는 생산국이었지만, 나의 꼴난 관심이라는 것은 그저 와인의 맛이나 보고 건들거리며 나온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감선생님의 차가운 눈빛으로 하나하나 배워야 하는 학생신분이다.

이 와이너리의 특징은 소량 생산 농민이 주로 참석한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농들이 대대적 시설투자로 시장점유율을 선점해가는 모양새만 보다가, 소농민들이 주로 참여한다는 이 와이너리를 보니 여간 부러운 일이 아니었다. 소농들이 적극적으로 농사에 전념한 후 가공에도 참여할 수 있으니, 이 보다 좋을 순 없는 일이다.

명품 발효식품으로 유명한 모데나 지역의 인증제도는 IGP(Indicazione Georafica Protetta)라는 지리적 표시제와 DOP(Denominazione di Origine Protetta)라는 인증제도로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생산자는 생산지역의 준수는 물론이고, 자신에게 할당된 생산량만 생산한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해마다 생산과 수요의 불균형으로 배추, 양파 등의 가격폭락을 밥먹듯이 하는 우리 현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역사, 품질, 전통에 대한 것이 반드시 증명되고 포함되어야 인증이 확정된다는 것이다.

품질이야 당연히 입증되고 증명되어야 하지만, 역사와 전통까지... 그러다 보니 1,2년 내에 받을 수 없고, 역사와 전통이 뒤따르려면 오랜 기간의 노력과 인내가 녹아들어야 인증이 가능하다는 해석이다. 이 인증은 이탈리아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을 정도로 엄격하다.

이 와이너리 연수가 시사하는 점은 실로 많았다.

첫째, 생산자들 스스로 와이너리를 만들어, 판매를 주도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는 엄격한 인증제도로 생산자들은 그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고 인증관리에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다. 셋째, 이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와인의 70% 이상이 지역에서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지역사회와 협동조합이 함께 나가는 모습이 자연스러워보였다. 순간, 난 울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농가공품에 얼마만큼의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는지 돌아보니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지역에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멀고 먼 이탈리아까지 와서야 깨달았으니 딱한 일이었다.

넷째, 연합회(Palatipico)를 만들어 지역 특산물의 홍보와 판매촉진 등을 전문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지역을 함께 알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가지 예로, 발사믹 식초병과 포장을 디자인 한 사람이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를 디자인한 디자인계의 살아 있는 전설 조르제토 주자로 라는 사실을 듣고 뒤로 자빠지는 줄 알았다. 그만큼 제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러한 것이 퍼즐처럼 모여져 명품으로 자리매김 된다는 점에서 고개가 숙여졌다.

친환경 농업의 메카인 울진 역시 지역적으로나 농특산물에 있어서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모데나 지역의 특산물 전략을 벤치마킹하여 접목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소농민들이 자신의 생산물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도록 저변 시스템의 확립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농민 상호간의 협력과 공동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안에 초점이 두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모데나처럼 울진의 지역특산물과 관광 등을 한데 묶으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연수지에서도 기죽지 않고 하나하나 접목할 꺼리를 흡입할 수 있었다.

연수는 배운 것을 반드시 내 지역, 내 농장에 접목하지 않으면 누구 말마따나 ‘자두 푸딩에 자두가 빠진 격’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기에 연수 발거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배동분; 2000년 서면 쌍전리로 귀농하여 낮에는 야콘농사를 지으며, 밤에는 글을 짓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산골살이, 행복한 비움>과 <귀거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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