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구랍 31일 점심 때 쯤 방콕시내 한국인 식당에서 딸들을 만났을 때 한참동안 눈물만 나오지 말문은 막혀버렸습니다. 동남아에 한달간의 일정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딸들이 쓰나미가 오기 전날 태국 어딘가에서 보트를 탄다는 전화를 걸어온 25일 이후, 5일간 연락이 두절되면서 억장처럼 무너져 내리는 심경을 체험했던 근남농협 직원 장상훈(46세)씨. 26일 이후 장씨의 가족들과 이웃사람들은 매일 수산리 장씨의 집에 함께 모여 TV뉴스를 틀어놓고 쓰나미가 사람들을 쓸어 가는 장면을 볼 때 마다, 마치 장씨의 딸이 휩쓸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우성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같이 애를 태웠다. 딸아이의 배낭여행 본래 일정에는 27일 푸켓지역을 방문하도록 짜여져 있어 현지 일정의 변경으로 하루 쯤 먼저 도착할 수 있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3일 째 되던 날 장씨는 같은 처지를 당한 행곡리의 최호덕씨와 함께 무작정 태국행 비행기를 탔다. 가서 시신이라도 수습해 와야 한다는 생각외에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한국을 떠나 아이들을 만나기까지 약 3일간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30일 아침 방콕에 내려 다시 국내선 비행기로 푸켓에 도착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할 뿐이었다. 피해를 당한 바닷가 지역까지는 차로 3~4시간 걸리는 먼곳인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마침 등에 「경비」라고 쓴 한국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119중앙본부 구조대원으로 이들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도움으로 택시를 타고 30~40분 걸려 교민들이 설치한 상황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의 유수 방송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은 장씨 일행을 바로 병원으로 데려가 부상자들의 얼굴을 확인시켰으며, 사진을 찍어 둔 시신들 속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찾아보도록 했다. 저녁이 되자 방송사 팀들은 31일 아침 7시에 한국사람들의 희생이 가장 컷던 ‘카오락’으로 가 거기서 아이들의 얼굴을 찾아보자고 했다. 유럽쪽에서 가족들을 찾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는지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교민의 도움으로 겨우 방을 구했지만 자정이 넘도록 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 1시반 경 휴대폰의 벨이 울었다. 아이 엄마로부터 딸이 살아 있음이 확인되었다는 연락이었다. 장양의 일행은 휴대폰조차 터지지 않는 내륙 쪽의 오지를 향하고 있었는데, 전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일정을 마치고 30일 방콕시내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들은 같은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 나오던 서울지역 배낭족 학생들과 같은 숙소에서 27일 1박하였는데, 서울에 도착해서야 쓰나미의 위력을 알게 된 서울학생들이 이들의 생존을 증언했다고 한다. 장씨는 이번 일로 동고동락했던 이웃들과 더욱 친밀하게 되었으며, 가족들의 우애가 더욱 깊어졌다고. 특히 아이들 셋은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알게 되어 이제는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전화도 자주하고 예전보다 말도 잘 듣는다고. 옛 말에 딸을 낳으면 비행기를 탄다더니 금번에 실감했다고요. 본사를 방문한 장씨는 농을 건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