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칼럼> 전병식 주필


               전병식 주필
최근에 나는 세 사람을 처음 만나거나 다시 만났다. 물론 이 세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실제 얼굴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현재 ‘사람이 중요하다’ ‘한 사람의 리더가 중요하다’ 는 나의 생각과 판단에는 큰 영향을 줬다.

빅토르 최는 불과 며칠전 SNS 카카오스토리를 통해서 다시 만난 경우다. 80년대 초반일까? 빅토르 최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러시아 특유의 약간 저음의 음울한 감정속에 우러나는 엄청난 에너지에 놀랐다. 그 선동적인 호소력에 놀랐다.

인터넷 웹상의 그에 대한 소개는 “구소련의 한인 3세 락 가수다. 84년 4인조 밴드 ‘키노’ 를 결성, ‘혈액형’,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등의 앨범을 제작 5백만 장이 팔렸다. 그가 영화배우로 출연했던 ‘아싸’ (89년작)」작품은 무려 1,6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89년 오뎃사영화제에서 최우수 배우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음악 성향은 펑크록 스타일에 러시아 특유의 음울한 선율에 저항과 자유의 메시지를 담았다. 구소련 말 혼란의 시대에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오른 그는 90년 여름 라트비아 공화국 리가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요절했다. 소비에트 전역에서 이에 좌절한 5명의 여자가 자살했고,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겐트 등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그가 숨진 후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는 추모의 벽이 설치됐고, 1993년에는 모스크바 콘서트홀 명예가수 전당에 헌액됐으며, 사망 10주기에 구소련 전역이 추모 열기에 휩싸였을 정도다.” 라는 설명이다.

락이 본래 저항과 자유, 개혁을 부르짖는 팝의 한 장르이다. 8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의 연장선상이나 동행선상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빅토르 최라는 한 청년 한인 3세 락 가수가 미친 영향은 가늠하기 힘들다. 당시 소련정부에서 체제붕괴를 두려워 해, KGB를 시켜 살해했다는 음모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다.  

또 한 사람은 전태일 투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울진공공도서관에서 빌려온 ‘전태일 평전’ 반납 마감날이다. 본래 눈물이 흔한 사람이지만, 내가 책을 읽다가 가장 많이 운 책인 것 같다. 세상사 유행과 변화에 둔감한 나는 이제야 전태일 평전을 읽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전에 읽었다면 아마 노동계 투사가 되었지 않았을까!

그가 자신의 몸을 불태워 이 땅의 노동인권을 찾아 주었다. 어린 소녀 노동자들이 못 먹고, 병들어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환기도 되지 않는 작고, 천장 낮은 공간에서 먼지를 마시며, 14시간의 중노동 속에서 죽어갔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노동인권의 싹을 틔웠다. 처음으로 언론이 주목했고, 대학이 움직였다. 학생들이 움직이고, 교수들이 나섰다. 그의 희생은 오늘 한국사회 노동인권의 모태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브라질의 축구선수 네이마르다. 그가 없는 브라질은 선장을 잃은 나룻배였다.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 4강 대결에서 전차군단이라는 독일에 7대1로 참패했다. 축구없는 브라질 역사는 없다. 2억명 브라질 국민들을 흐느끼게 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겁난다. 축구 황제가 펠레가 살아있는 나라, 월드컵에서 세계 최다 5번이나 우승했던 나라!
이처럼 한 사람의 영향력이 세상을 움직인다.

빅토르 최가 소비에트연방을 해체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전태일은 한국 노동인권의 태두가 되었고, 네이마르 한 선수가 2억명 브라질 국민들의 희망과 좌절이었다.

한 사람의 리더, 그의 역할은 크고도 클 수 있고, 작고도 작을 수 있다. 울진에는 더 이상의 원전관련 시설의 설치는 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공문서를 가지고도 아무런 리더쉽을 보여주지 않는다.

원전방사능 폐기물 유리화 시설의 설치·가동과 관련하여 주민들과 소통소차 하지 않았고, 한울원전 1~4호기의 60년까지의 수명연장에도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원전관련 14개 선결조건이 후결조건으로 벌써 바뀐 지금에도 아무런 리더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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