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JC 제45대 중앙회장 홍성태


올해는 처마에 놓인 문주란에서 꽃이 조금 일찍 피었고 부실한 편이다. 많은 화분 중에서 특별히 기다리지는 않지만, 문주란 꽃이 피면 매우 반갑다. 잘 느낄 수 없는 아주 가느다랗고 은은한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더 솔직한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문주란은 아버지 때부터 키운 것이고, 해마다 싹을 틔워 주변에 꼭 분양을 한다.

문주란 꽃이 필 무렵이면 마당에 있는 오랜 세월 지낸 매실 두 나무에 추수가 끝나지만, 따기 힘든 끝가지에 붙어있는 빨 노란 이삭 따는 재미가 제법 괜찮은 데, 그 이삭으로 술을 담궈 고운 빛깔의 술을 사랑방에서 깊은 밤에 혼자 한두 잔 들이키는 재미는 쏠쏠하다.

장마 전 초여름 삶의 모습인데, 여기에 빠지지 않은 것이 고양이들이다. 새벽 중간대문을 열면 마을이 눈 아래 들어오고 어김없이 꼬리치는 고양이들이 화단에 숨으면서 아는 척 하려한다.

가끔 이른 새벽 중간대문을 열려는 순간, 문틈으로 기막힌 장면을 목격한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솟아오르는 고양이가 나비를 잡는다. ‘바람 잡는 호랑이’ 라는 옛말이 문득 생각난다. 집안 구석구석 고양이 때문에 피해가 있고, 이웃들도 심심찮은 저지레로 피해를 보는 듯하다. 아내와 동네 분들은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줄 알고 있다. 그 고양이들은 그냥 정으로 먹이를 늘 주고 있을 뿐이다.

주말이면 늘 마당을 청소하는데, 나를 많이 괴롭히는 것이 목련나무와 네그루의 회화나무다. 사람들은 단아하고 고귀한 꽃으로 목련을 꼽지만, 오랜 세월 함께 해보니 목련나무는 참 많은 쓰레기를 일 년에 여러 번 만들어 내고, 문주란 꽃이 활짝 필 무렵에 시작하는 회화나무의 꽃 뭉치들에서 자자한 꽃잎 쓰레기가 쏟아진다.

목련나무는 내 JC시절 심어서 힘든 시절 같이 한 오랜 세월이 20여년이 넘어 동네에서 가장 큰 목련이 되었다. 회화나무는 집 주변에 세 그루이상 있으면, 집안에 정승이 난다고 해서 욕심에 심은 것이 오랜 세월이다.

사랑방에는 아버지 대부터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벽에 걸린 색 바랜 무명작가 한문 액자와 40년이 넘은 책상, 은주엄마와 결혼할 때 혼수품으로 가져 온 책장도 온전하게 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 알알이 박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게서 나는 냄새도 뺄 수가 없다.

어디 그것뿐이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오랜 세월 지탱해 준 한옥으로 전교(아들) 집이고 나는 57년 전 안방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평생을 사신 집이고, 우리 내외도 역시 살다가 죽을 집이다. 태어나기는 안방에서 태어났으나, 나는 사랑방에서 죽고 싶다.

JC시절 아버지께서 손자인 전교한테 증여를 했고, 전교가 서울에 사니 아들집을 지켜주는 셈이다. 로마에 가니 기원전에 지은 가정집이 아직 있더라.

또 사랑방 깊은 곳에 거의 30년이 된 지금은 사라진 회사 TV인데 쌩쌩하고, 지금도 잘 달리는 포텐샤 승용차도 22년이 된 차다. 세탁기도 TV처럼, ‘물방울세탁기’로 빨래를 잘 해준다. 참 신기한 것은 아직도 AS가 되니 우리나라 가전제품이 세계 최고 같다. 집에 있을 때 가장 즐겨 입는 츄리닝도 내 기억에 JC 중앙회장 마칠 무렵, 아내가 봉화 장날 사준 것이다.

이 모두가 책상머리에 여러 개 꽂혀 있는 법정스님의 수필집에 나오는 ‘시절인연’이다. 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사는 필부필부(匹夫匹婦; 평범한 사람)들은 제 것인 양 챙기고 살뜰하지만, 바람 같은 인생사와 세상사를 보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空手來 空手去) 것뿐이다.

그래도 나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함께 해주는 것이 있어 좋다. 사람을 만날 때 그 집안 내력을 보고, 집을 방문했을 때 책꽂이에 책이 많은가, 화분이 단 몇 개라도 있는가를 본다.

사람 향은 ‘오랜 세월’ 에서 나오고, ‘오랜 세월’ 다듬어진 인품은 한결같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전 강태공의 낚싯대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의 향’이 묻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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