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1)


나는 결혼하여 송파구 석촌동에 둥지를 틀었다. 단독주택에 입주하여 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그즈음 잠실 일대가 개발 붐을 타고 건물이 한창 들어서고 있었다. 가까운 친척들에게 전화를 하여 위치를 설명하였지만, 주변에 공터가 많아 쉽게 찾지 못할 것 같았다.

생각 끝에 ‘전세중’이란 이름을 큼직하게 써서 대문 앞에 붙여두었다.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한데 외사촌 동생이 집을 못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석촌대로변에서 내려 우측 골목길로 들어오다가 두 번째 집이라고 말했다. 한참이 지나서 다시 또 전화가 왔다. “집을 못 찾겠어요, 다시 한 번 천천히 설명해 주세요.”

나는 튀는 레코드판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대문 앞까지 갔는데 그 집은 전세 놓는 집이라 해서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 집이 우리집이다. 전세중이라고 붙여 놓은 집은 전세를 놓는 집이 아니라 바로 내 집이다”라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 당시만 해도 전세를 놓는 사람이 많았다. 1970년대 농촌에서 도회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전세 붐이 일었다. 잠실 일대는 개발지역이라 세들어 사는 가구가 많았는데, 주민이 직접 대문 앞에 ‘전 세 중’이라고 써 붙여 놓았었다.

그뿐인가, 직장에서 “아직까지 전세중인가” 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동료들이 있다. 내 이름은 명사형과 동사형의 의미가 같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름이란 누군가에게 잘 암기되어야만 좋은 이름 아닌가.

내가 자란 조그만 고향 마을에서도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이나 더 있다. 족보를 넘겨봤더니 같은 이름이 여러 명이나 되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이름으로 쓰는 것을 보면 나쁜 이름은 아닌 듯하다. 사실 나는 전세로 산 것은 일 년 남짓 한데, 내 이름으로 인해 전세살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

예부터 이름은 의미를 작게 지어야 잘 산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 이름의 의미는 크다. 한문으로 풀이하면 내 이름에 담긴 뜻은 세상에 나가서 잘 되고 크게 성공하란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름 외에도 브랜드처럼 지니는 이미지가 있다. 부드러운 사람, 날카로운 사람, 적극적인 사람, 소극적인 사람, 책임감 있는 사람, 게으른 사람, 긍정적인 사람, 불평만 하는 사람, 겸손한 사람, 교만한 사람, 배려하는 사람, 자기 입장만 고집하는 사람…….

이렇게 우리에게는 이름 앞에 다양한 수식어가 하나씩 붙게 된다. 남들과 다른 작은 매력은 브랜드를 만드는 열쇠이다. 나 스스로 어떠한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자기에게 일이 주어졌을 때 불평만 하는 사람보다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보다는 적극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성공을 한다. 살아가면서 말과 행동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나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에게 훌륭한 이름을 지어 주지만, 뜻을 저버리는 사람들도 많다.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듯하다.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아간 에디슨은 세계 최초의 민간 연구소를 세워 발명가로서의 이름을 남겼고, 베토벤은 ‘운명 교향곡’을 작곡하여 위대한 음악가로 이름을 빛냈다. 밀림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는 슈바이처는 학자로서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아프리카에 병원을 지어 박애사업에 나섰다.

브랜드란 무엇인가. 특정 대상에 대한 이름, 이미지, 연상 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김연아는 탁월한 재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 관심을 끌어 ‘빙상 위의 요정’이 되었다. 피겨의 불모지에서 혹독한 훈련으로 그녀만의 브랜드를 가졌다. 그녀의 브랜드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우리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구멍가게도 브랜드가 되는 시대, 나의 브랜드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나는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地天命을 지나서, 내년이면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한다는 이순耳順이다.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어언 십여 년이 되었다. 앞으로 십 년 이십 년, 적어도 여든 살까지는 글을 쓰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시력도 잃지 말아야 하며, 오장육부도 건강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의 세계를 잘 다듬어 가는 것 아닌가. 내 인생도 깊어가는 가을처럼 소박하게 여물어 가기를 소망해본다. 내가 쓴 글을 독자가 읽고 감동을 받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어떠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는가.
예술가가 예술혼을 담아내려고 끝없이 노력하듯 삶을 창조하기 위하여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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