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현과 대왕금강송 특집 ... 2편


본사는 최근 한국사회 큰 이슈가 되었던 장국현 작가와 울진 대왕금강송에 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향후 6회분 특집면을 연재한다.
2010년 1월 22일 국내 매스컴 중 영남일보가 처음으로 특집보도를 하기 시작하여 모두 6차례 특집면을 꾸몄다. 본사는 이 6회분 내용을 전제한다. 지난번 351호에 1편에 이어 특집 2편을 준비했다. 
                                                                             <편집부>


200년 넘은 소광리 금강송 8만여 그루

조선때 벌목 금지한 황장봉계표석 세워져

 

아무래도 금강송(金剛松)이 시샘하는 모양이다.
며칠째 봄바람이 그악스럽다. 울진군 서면으로 출발하던 지난 7일 오전도 시들 기척이 없다. 오전 8시쯤 시동을 걸었다. 중앙고속도로 영주 IC에서 봉화를 거쳐 울진으로 가는 36번 국도.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노루재 터널을 지나 울진 서면으로 접어들면 주변 산세의 질감이 가수 임재범 버전이다. 금강송 때문이리라. 공개된지 얼마안된 석회암 동굴 안으로 들어가듯 으스스한 기분이다. 일종의 ‘고송기(古松氣)’.

영양군 수비면 수하계곡에서 발원, 울진 불령사와 성류굴을 휘감고 가는 왕피천과 합류되는 울진군 서면 쌍전리 대광천 합수 지점에 광천교가 서 있다. 금강소나무 숲길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거기서 좌회전.

울진발 금강송의 속살이 리얼하게 다가선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같은 금강송 군락의 위용을 헤아린다. 모처럼 심장이 호사를 누린다.

대광천 옆구리를 붙들고 있는 917번 지방도. 끝손질이 1% 부족한 대한민국표 도로공사 티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세계적 금강송 군락지를 관통한다는 걸 알았다면 좀 더 에코로드답게 짰을 텐데. 금강송 로드와 상충되었고, 미학적 배려도 아쉬웠다. 그냥 도로를 위한 도로를 공학적으로만 구축된 듯. 추후 숲길 연장 공사 때는 공공디자이너도
 

참석해야 될 것 같다. 이 구간은 태풍 매미 직후 2004년쯤 개통. 그 때만 해도 소광리 금강송숲길은 일부 오지탐험가들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광천교에서 4㎞를 더 가니 1차 집결지인 소광1리 하늘채 펜션이 나온다. 대왕송 루트 개척을 위한 베이스캠프 구실을 하는데 2007년 오픈했다. 이후 금강송 펜션도 생겨난다.

이번 위클리포유의 대왕금강송 취재 때 서울·대구·청도·달성 등 전국 각처 ‘금강송 애호가’들도 동행했다.

일행은 10명 남짓. 사진작가 장국현씨, 현재 장씨를 1년간 밀착하며 소나무 관련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제작중인 외주 다큐전문 영상팀의 박익찬 PD와 박노필 촬영감독, 한국의 명품 소나무 탐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전창욱 사광회 전 회장, 연꽃 사진에 조예가 깊고 특별히 다음날 오전 대왕송을 기리는 고유제를 직접 집전할 달성군 논공 금화사 주지 진성 스님, 소광리 산세에 조예가 깊고 가끔 멧돼지 등도 잡으면서 야수처럼 살아가는 소광리 주민 이용준씨 등이 함께했다.

오전 11시30분쯤 남의석·이옥화 노부부가 차려주는 산촌표 점심을 먹고 500년 금강송부터 친견하러 갔다.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 금강송과 의기투합한 소광리

모르긴 해도 소광리는 ‘대한민국 금강송의 고향’으로 보인다. 금강송, 위로는 북한 금강산, 아래로는 영덕 북부권까지 백두대간 동쪽 권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다. 하지만 소광리만큼 양과 질 양면이 모두 출중한 구역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설에는 소광리에는 수령 500년급이 5그루, 200~300년짜리는 무려 8만여그루가 분포해 있다고 한다. 붉은빛을 띠는 게 특징인데 보통 수고 20m 이상부터 그런 빛이 나온다. 여느 소나무와 달리 상단부에만 가지가 집중되고 그 아래는 가지가 없다. 몸통 굵기가 전주처럼 쭉 곧아 ‘미인송’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령을 측정하기 위해 ‘생장추’를 사용한다. 수심(樹心)까지 나사처럼 파고들어가면서 밖으로 빼낸 샘플용 목질의 나이테를 보고 나이를 판단한다. 특히 문화재청에서는 금강송을 ‘문화재보수용목재’ 명목으로 미리 찜해둔다.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금강송숲길(1.5㎞)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서벽리의 금강송은 일명 ‘춘양목’으로 불린다. 예전 베어진 소나무가 춘양역에 집결된 탓이다. 2001년에 ‘문화재용 목재 생산단지’로 지정되어 줄기가 곧고 밑둥이 우람한 나무만 골라 노란색 페인트로 1번에서 1487번까지 번호표를 써 놓았다. 경주 황룡사9층목탑 복원용 등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산림청에서는 10년 단위로 조사를 하는데 1령급(1~9년), 2령급(19년까지), 3령급(29년까지), 4령급(39년까지), 5령급(49년까지), 6령급(59년까지) 이상으로 금강송 수령을 분류하고 있다. 6령급 이상은 소광리 소나무 중에서 4% 정도란다. 물론 서면 전체가 금강송 군락지고, 그 중에서도 소광리·쌍전리·전곡리·두천리 등이 ‘금강송 섹터’라고 보면 된다.

현재 서면에는 모두 3개 구간의 ‘금강소나무숲길’이 조성돼 있다. 국내 금강송숲길로서는 가장 풍성한 콘텐츠를 갖고 있다. 산림청과 <사>울진숲길이 손을 잡고 대한민국 대표 숲길 브랜드로 만들고 있다. 역사는 아주 짧지만 일반인들에게 까다롭게 공개되고 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만 걸을 수 있다.

2010년 7월 두천리~소광2리를 잇는 13.5㎞가 맨먼저 탄생한다. 이후 2개 구간의 숲길이 더 생기고 향후 통고산 등을 포함해 4~5구간도 만들 예정이다.

다음날 오전 대왕송을 보기로 하고 첫날에는 500년 금강송부터 만나기로 했다.

첫날 걷는 구간은 제3구간 18.3㎞ 중 일부. 전체 코스를 다 보려면 소광2리 금강송펜션에서 출발해야 된다. 이어 저진터재, 너삼밭, 화전민터, 금강송군락지초소, 거기서부터 다시 500년 금강송, 못생긴 금강송, 미인송 등을 보고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된다. 일행은 출발점에서 7.8㎞ 떨어져 있는 금강송초소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탐방로를 걸었다.
 

◆ 소광리에서 만나는 화전민터

6.8㎞ 지점에 있는 화전민터.
색다른 스토리를 안겨준다. 세인들의 뇌리에서 잊어져가고 있는 소광리 화전민의 애환사가 숨어 있다.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때 이 마을 인근에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정부는 강원도~경상도 산간 화전민에 대해 통제를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화전민 집단이주가 진행된다. 그때부터 조망이 좋은 산꼭대기에 헬기장도 가설한다. 이에 따라 2천여평의 밭을 화전민 택지로 조성해 기와집 11개동을 짓는다. 모두 22세대가 입주했는데 이주비는 전액 국비였다. 하지만 교통 불편과 농사 짓기 어려움으로 인해 모두 떠나버렸다.

화전민터에서 30여분 떨어진 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금강송 군락지가 시작된다.

이를 지키기 위해 초소를 만들어 출입을 체크하고 있다. 3구간은 1일 100명만 탐방할 수 있다. 산림청 직원들이 신분을 일일이 확인한다. 도로에서 실망한 맘이 이 대목에서 다소 회복됐다. 예약한 소수에게 공개한다는 것, 성숙한 국내 자연보호문화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초입에 ‘소광리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란 안내판이 적혀 있고, 그 옆에 안도현 시인의 금강송을 그리는 시를 돌에 새겨놓았다.

울진금강송을 지키는 남부산림청 울진국유림관리사업소. 여기선 금강송을 보호하기 위한 산림청 차원의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게 ‘생태경영림’이다.

산림청 직원들에겐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일반에는 금강송 군락지가 친근. 그게 이젠 ‘금강소나무숲길’로 변했다. 생태경영림보다 산림유전자보호구역이 정식 명칭이다. 그게 조금 순화돼 생태경영림이 되고, 다음에는 금강송군락지, 이게 관광상품으로 변해 금강송숲길이 된 것이다. 국내 생태경영림은 소광리를 비롯, 영양군 수비면과 봉화군 서벽 등 세 곳 뿐이다. 이 셋을 남부산림청에서 관리한다.


◆ 조선의 자연보호석인 황장봉계표석

광천교에서 5㎞가량 들어온 곳에 ‘황장봉계표석(黃腸封界標石)’이 있다.
장씨가 일행을 차에서 내리게 한 뒤 그 표석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대광천 옆 바위 옆에 음각돼 있는데 안내를 받지 못하면 대다수 지나친다. 지난해 동쪽 지역에서 하나 더 발견됐다. 황장목을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봉산(封山)으로 지정해 놓은 경계석으로 일종의 ‘조선조의 그린벨트’인 셈이다. 광천교 옆 표석은 조선조 숙종(1680) 때 세워졌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소광리 금강송을 어떻게 알았을까. 울진문화원이 펴낸 ‘울진의 설화’에 따르면 인조 6년(1628)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구미동에 살던 만휴 임유후 선생을 중심으로 이 고장 문사들이 수친계(壽親契)와 상포계(喪布契)를 결성했고 그 계약 제2항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부모가 상을 당하면 유사가 친히 가서 살펴보고 품질 좋은 소나무 관목을 소광(召光·소광리)에서 구입한다’. 효성 지극한 울진 고을 선비들은 널을 만들 때 금강송을 사용했고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것이다.

그럼 황장목과 금강송은 어떻게 다른가.

최근 금강소나무숲길 가이드북 제작에 간여한 남부산림청 문화휴양팀 임병억 팀장은 “황장목이라 함은 왕실에 건축자재로 사용한 목재의 통칭입니다. 금강송이 황장목일 수 있지만 금강송이 아닌 일반 소나무도 황장목이 될 수 있죠. ‘금강송은 모두 황장목이다’고 단정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황장목 가운데 금강송이 많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귀띔했다. 금강송이란 이름은 1928년 일본 식물학자 우에키 박사가 소나무의 외형상 수형으로 구분한 것이다.

‘소나무 박사’로 불리는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과)는 “황장목이란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는 소나무 관곽재(棺槨材)”라고 주장했다. ‘세종실록’에 보면 ‘천자의 곽은 황장으로 속을 하고, 황장은 소나무의 속고갱’이라고 적시했다. 황장은 ‘몸통 속이 누런 소나무의 속고갱이’를 의미. 몸통의 주변부(변재)는 세포가 살아 있고 죽은 세포로 이뤄진 중심부(심재)는 송진이 농밀하게 박혀있어 잘 썩지 않는다.

일반 소나무는 심재율이 52%이지만 소광리 금강송은 무려 87%란 보고도 있다. 이런 스타일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고 오직 울진의 독특한 토질환경에서만 가능하다는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금강송은 산불을 오히려 좋아한단다. 금강송은 번식하려고 해도 두터운 부엽층 때문에 씨앗이 제대로 침투하지 못하는데 산불이 나면 표토를 만날 수 있어 더욱 잘 싹을 틔울 수 있단다.

참고로 조선 선박 및 궁궐 건축용으로 전북 부안군 변산 솔숲과 충남 태안군 안면도 솔숲의 소나무를 ‘국용소나무’로 관리했다.

덕분에 울진의 금강송은 수백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강점기로 접어들며 남벌된다. 6·25전쟁 당시 일부가 불에 타 사라졌고 전쟁 뒤에도 화목용 목재로 엄청나게 베어진다. 광복 이후 수입 목재가 전무한 탓에 국내산 소나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벌목은 1959년 정부가 육종림으로 지정한 뒤 겨우 중단됐다. 본격적인 보호와 보전 사업이 시작된 것은 1982년 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고나서부터.


◆ 500년 금강송

4월초지만 산록에는 눈이 드문드문 보인다. 서기롭다. 먼산 음지에는 5월초까지 눈이 남는단다. 금강송의 생태를 공부할 수 있는 통나무집 형태의 금강소나무전시관을 지나 좌우에 도열한 금강송의 함성을 완상하며 15분쯤 걸었다. 금강송숲길의 진미를 비로소 음미할 수 있었다.

3코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500년 금강송이 산신령처럼 정좌하고 있다. 솔가지 무더기가 상·중·하단으로 절묘하게 구획지어져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더 돋보인다. 붉은 몸뚱이와 진녹색 솔잎의 앙상블을 피사체로 포착하기 위해 일행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이 금강송은 조선 성종(1480년) 무렵에 태어나 아직 살고 있단다. 그 소나무 옆 산길로 올라가면 2004년 금강소나무 1천111본을 식수한 기념으로 조성한 금강송공원을 구경할 수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소나무와 참나무가 한 몸을 이룬 연리지와 다른 금강송보다 볼품없는 못생긴 금강송도 있다. 이 금강송도 500년급인데 다른 것과 달리 몸체가 굽어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실감케 한다.


◆ 폭풍 속에 본 대왕송

다음날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소광리 산하가 울부짖고 있었다. 태풍급 봄바람이 배고픈 맹수의 주둥이처럼 그악스러웠다.

주민 이용준씨가 가이드를 했다. 소광1리 마을회관 근처에 있는 임도의 차단봉을 올리고 산림청 관계자가 입회한 가운데 카라반 같은 대열을 형성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바람이 너무 세차 발을 제대로 떼기 힘들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대구 날씨를 물어봤는데 쾌청하단다. 왜 그럴까? 산림청이 그 이유를 알아냈다.

대형 산불은 산불이 30㏊ 이상 번지거나 불이 24시간 이상 지속되는 걸 말한다. 4월초 강원도~경북 북부 동해안 지형에만 부는 국지성 돌풍을 ‘양간지풍(襄杆之風)’ ‘양강지풍(襄江之風))’이라고 한다. 봄철에 이동성 고기압이 우리나라로 이동, 대기가 불안정한 역전층이 강하게 형성될 순간 최대풍속이 초속 32m까지 관측되는데, 이는 영서지방의 차가운 공기층이 태백산맥과 상층의 역전층 사이에서 압축되면서 가속되기 시작하고, 경사면을 타고 영동지방으로 쏜살같이 날아간다.

양은 양양, 간은 간성, 강은 강릉을 의미한다. 실제 2010년 4월7일 삼척에서 산불이 나 울진 서면 금강송이 직격탄을 맞았고, 2005년 4월 양양 산불로 인해 낙산사까지 화마에 소실되기도 했다. 지난 10여년간 강원도에만 무려 450여건의 산불이 터졌다. 일행도 가장 위험한 날 산행을 하는 것이다. 산불 때문에 아예 올때 성냥과 라이터도 숙소에 두고 왔다.

하절기에는 무성한 잡목 때문에 대왕송 곁으로 가기 어렵다. 동절기에는 무릎 이상 차오르는 눈 때문에 걷기 어렵다. 어쩌면 4월초가 제격인데 돌풍으로 인한 산불 때문에 아쉽게도 일반인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앞장서던 이용준씨가 환약 같은 산양의 똥을 가리킨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1급으로 지정됐고, 1968년 천연기념물 제217호로도 보호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좌우로 조망하면서 바람능선을 걷는다. 12년전 산불로 인해 상당한 금강송이 없어진 것 같고 군데군데 참나무 군락지가 굳건하게 자릴 잡았다. 그 아래 진달래가 안개처럼 깔려있었다.

다큐팀 때문에 갔다 쉬었다를 반복한다. 하지만 바람은 대왕송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포악스러웠다. 마지막 봉우리를 넘어서자 사위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바로 고대하던 대왕송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행은 텐트 속에서 일박을 했다. 식사도 빵으로 대신했다. 자정 무렵 바람의 강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장씨는 대왕송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전전반측(輾轉反側)했다.

다음날 오전 5시30분 신기하게도 바람이 멎었다. 일행은 눈꼽도 떼지 않고 오전 6시 갖고 온 제수로 고유제를 봉행했다.

                                                    /영남일보 이춘호 기자 2012년 4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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