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마을 목동(牧童) 이야기


                                         이 상 영

세월에 묻혀 살아오면서도 내 고향 수산마을은 늘 자랑스러운 이야기 꺼리가 있다는 것이 퍽 다행스럽다. 가끔 왕피천이 홍수로 범람할 때면, 강물이 마을로 넘치지 못하게 보호하고 있는「마릿재」라는 작은 동산을 휘돌아 나가게 됨으로 마을 이름을 수산(守山)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 위쪽으로는 넓은 대나무 밭이 홍수를 막아 주기도 하며, 동쪽으로는 우람스러운 솔밭이 넓은 들판에 심어져 있는 농작물을 홍수나 태풍으로 부터 막아줘서 마을과 농토와 주민들을 안전하게 보호 해주고 있다.

관동팔경 중의 한 곳인 망양정을 마릿재에서 바라볼 수 있고, 지금은 엑스포 공원이 된 넓은 솔밭이 동해바다로부터 샛바람과 함께 날아오는 짭짤한 소금기를 막아주는 방풍 역할도 해줌으로서, 옛날 솔밭 옆의 큼직한 과수원에는 이른 봄이면 파란 매실이 늘 풍요롭게 익어갔다.

그 시절 수산마을에는 뚜렷한 경계선은 없었지만, 7번국도를 중심으로 서쪽을 윗마을이라 하고, 동쪽을 아랫마을이라 불렀다.  8.15해방 전후 무렵 수산마을에는 여름철 농한기가 되면, 농사용으로 부리는 소(農牛)를 집단적으로 방목하기 위해 소먹이는 목동을 관리하는 어설픈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 조직을 소먹이계라 부르기도 하였다.

소 먹이 아이들을「목동」이라고 부르겠다. 목동들의 구성원은 주로 초등학교 3학년에서 5학년생들이 중심이 되었고,「소강구」라는 책임자를 두고 있었다. 소강구는 목동들을 인솔하여 방목할 장소를 선정했다. 방목지에서 소 먹이는 방법을 궁리하고, 소를 지키는 책임구역을 배정하는 일도 그가 담당했다. 소강구는 마을 좌상이 목동들 보다 연령은 많고, 방목지의 지형 등을 잘 아는 경험있는 청년을 지명을 해 주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농경법이 기계화 농업으로 전환되면서 지금은 농가에 사육하는 소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70년 전만 하더라도 수산마을에서는 농사에 활용하기 위해 많은 농가에서 소를 양축하고 있었으며, 대체적으로 윗마을의 소의 마릿 수가 많은 편이었다.

농한기에 접어들어 집집마다 왕피천 강변 모래사장에 작은 말뚝을 박고 소의 목줄을 매어두면, 오전 내내 여름철 뙤약볕을 쪼여가며 아침에 먹은 여물을 쉬지 않고 반추 시키면서 아래턱을 움직이는 풍경은 평화스러운 농촌의 표상이었다. 약 20여 마리의 소들은 서서 졸거나 대부분은 모래밭에 배를 붙이고 누워 되새김질 했다.

필자는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면서 부터 우리 집 소를 먹이는 목동이 되었으며 평상시에는 농사일을 거들고, 아침 저녁으로는 소죽을 끓여 여물통에 퍼주기도 하면서 소와는 대화 없는 눈빛으로 “맛있게 많이 먹어라” 라고 소통했다. 농한기가 되면 아침나절에 소를 이끌고 강변으로 나가 말뚝에 소의 목줄을 매어 두었다가 점심때가 지나 15명 내지 20명 내외의 소먹이 목동들이 모이면 소강구가 인솔하는 방목지로 줄을 지어 소를 몰고 가곤하였다.

방목지에 도착하여 각자가 몰고 간 자기네 소의 고삐를 목에 넉넉하게 감아서 묶은 다음 자유롭게 놓아주면, 소들은 풀을 뜯어 먹기 위해 열심히 먹이를 찾아 숲 속으로 사라진다. 이 때 소강구는 방목지를 대체적으로 네모로 잡아서 목동들의 수에 따라 출발점인 서쪽 편과 반대 방향인 동쪽 편에는 비교적 한적한 지역이어서 2-3명, 산의 정상은 범위가 다소 긴 편이어서 4명 내외, 농지와 인접한 평지 쪽에는 소들과 많이 접촉함으로서 5-6명 정도를 배정했다. 

목동 1인당 약 200미터의 영역을 담당하면서 소를 지키게 하고, 방목지가 넓어지고 좁아지는 면적에 따라 목동들을 배치하는 수도 달라지곤 하였다. 방목하여 4시간 정도 시간이 지나 석양이 질 무렵에 소강구가 “소를 몰아오라”는 고함을 지르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연쇄 반응식으로 메아리치 듯 목동들이 전달하면서 동쪽 편으로부터 소를 몰아 출발점으로 모인다. 소 때와 목동들이 모두 모이면 소강구는 소와 목동 수를 점검하고 농산물 피해상황 등을 조사한 후 한 줄로 늘어서서 다시 마을로 내려온다.

방목지는 대부분 수산마을의 뒷산이었다. 하지만 70년 전 소를 먹이던 그 시절에 목동들이 사용하던 방목지 몇 개를 소개하면, 우선 국도변에 있던 “아카시아골” 이라는 야산은 목초는 다소 빈약하였지만 아카시아 나무가 많아서 무성한 잎을 소들이 잘 먹었기 때문에 먹잇감이 풍족했다.

“뒤로 골”은 마을에서 가까운 뒷산으로서 바닥에 목초가 많았고 면적이 넓어 2개의 방목지로 나누어 방목하기도 하였다. “업은 골” 이라는 방목지는 마을에서 먼 거리에 위치한 다소 깊은 산으로서 목동시절의 기억으로는 소나무와 잡목들의 숲이 울창하여 보행하기도 어려웠고, 시야를 막아 홀로 떨어져 소를 지키기에는 무서움을 느낄 정도로 한적(閑寂)했던 곳이기도 했다.

“곰의 논골” 이라는 방목지 역시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목동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지형이 많았고, 먼 거리에 가서 소를 먹이기에는 만만치 않았던 방목지이기도 했다. “두꺼비 재”는 마을에서 가까운 거리였으며, 비교적 익숙한 산이었으나 사방공사 구역이 많아 소들이 풀을 충분히 뜯기에는 먹잇감이 빈약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결국은 방목지에 먹잇감이 부족하면, 소들이 논밭에 심어져 있던 곡물을 습격하는 경향이 높았고, 반대로 먹을 것이 풍족하면 소와의 대면을 하지 못한 체 소먹이 일과가 끝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1주일 마다 소먹이는 일이 끝나면, 마을 좌상은 일요일 저녁에 윗마을과 아랫마을 2개 소먹이 계원들을 왕피천 강변 모래사장에 불러 모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소먹이 계회(契會)를 주관하면서, 목동들의 부주의로 농작물을 손상시킨 사고라던가 또는 소강구의 명령에 반항했거나, 싸움을 한 목동을 앞으로 불러내어 매 잡이로 하여금 회초리로 종아리를 서너 차례 때려 벌을 주면서 엄한 훈계로 차후의 사고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곤 하였다.

소먹이 계회가 끝나면, 좌상은 윗마을과 아랫마을 목동들의 씨름대항을 열어 양쪽 마을 목동들의 힘겨루기를 시키기도 하면서, 구경 나온 주민들의 응원과 함께 밤늦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농한기가 끝나 추수의 계절인 농번기(農繁期)가 오면, 소먹이 계는 1년간의 활동이 휴무에 들어가면서 다음해 농한기(農閑期)에는 어김없이 소먹이계가 다시 계속되곤 하였다.

팔순의 나이에 소먹이 목동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겪어야 했던 가난과 억압과 온갖 제재 속에서도 2년 동안 소를 먹이면서 일본말을 사용하도록 강요받았고, 8.15해방이 되어서도 소먹이 일을 계속하면서 성장기를 통하여 수련(修練)한 단순하고 어설펐던 조직에 대한 순응성을 익혔으며, 소를 사육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사리(事理)를 헤아리는 힘을 길렀다는 것은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중학교 진학과 6.25사변을 겪으면서 수산마을의 소먹이계도 자연히 소멸되고 말았지만, 조그마한 농촌에서 농경에 필요불가결의 요소였다. 소(農牛)를 농한기에 집단적으로 사육함으로서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책임감과 단체생활의 경험을 심어주었다.

마을 어르신네들의 소먹이기의 슬기와 지도방법, 그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특이하고도 엄격했던 수산마을의 풍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키워준 고향마을이 늘 고맙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제2회 울진문학상 공모전- 일반부 입선작
                                    울진신문사 주최/ 동아베스텍(주)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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