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 상

                      김나현 (울진중1학년)


내가 그렇게 큰 것을 바라본 적도 없고,
작은 것에 까지 욕심 내 본 적 없는 그저 평범한 17살이다


[1] - 흐드러지게 내리던 벚꽃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그런 걸까... 평소 친하지도 않던 빨갛고 노란머리의 무리들이 내게 소리도 없이 스며들었다
‘새학기 친구를 잘 사겨야 1년이 편하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지금 '나에 의해서' 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 1년, 혹은 수많은 세월을 갑갑하고, 답답한 이 땅 위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있다.
남들보다 좀 답답한 나라서, 맑은 눈동자는 커녕 썩어가는 흐리멍텅한 눈알에 낯설어하는 내성적인 가치관에, 마음은 앞서도 몸이 따르지 않아 항상 공기취급을 받던 나다.

허나,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내 미역같던 머리칼을 잡혀가면서까지 나는 이렇게 억울하게 살아야 하나! 처음 가져 본 낯선 기분의, 까맣게 칠한 손톱의 주인인 이 학생을 나는 언젠가부터 '하이에나'라 칭하기 시작했다. 잔인하게 물어뜯고, 자책하지 않는.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 마음속 세계에서만.

"야, 너 돈 있지?" 아아 하이에나가 날 사냥하려나보다. "빨리빨리 대답안하냐? 귀뚫어 줄까?" 결국 내 귓볼을 까만 손톱으로 비틀고, 꼬집고, 눌러버리는 잔인한 하이에나의 행동에 나는 그저 사냥감인 초식동물일 뿐이어서 뭐라 대답하지 못하겠다.
"내일 이만원만 빌려줘? 알겠지? 우리 친하잖아~ 맞지?" 불을 바른 듯 시뻘건 입술로 나한테 갑을관계를 확실시하려는 하이에나. "응, 나 돈 없어" 어디서 굴러들어온 자존감인지 내겐 가당찮은 깡으로 하이에나를 밀쳐내고 깊숙히 바다속으로 빠져버렸다. 내 내면의 바다 속으로.

[2] - 여느 때와 같지 않은 등굣길, 지나가는 학생들은 날 힐끗힐끗 훑어보며 지나간다. 나는 지금 교문 앞에 서서 소위 '삥'을 뜯길 위험에 처해 있다.

"니가 그 유명한 미친 후배니?" "와 뻔뻔해라" "어디서 눈 똑바로 쳐다봐?!" 그 하이에나가 무슨 얘기를 한 걸까... 그것보다도 나는 미친 후배도 아니고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는데, 착각의 늪에 빠져버린 멍청한 '선배' 라는 호칭도 아까울 만큼 인성이 쓰레기인 이 사람들을 지나, 교문을 지나려는 순간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어제 그 하이에나한테 잡힌 이후 머리카락은 화장실 변기통에 처박혀 버릴 뻔 했었다. 영락없이 진짜 한 줌의 미역이 될 뻔 했었는데, 윤기잃은 내 머리칼은 날 추궁하던 그 인간에게 넘겨졌다.

"어딜가냐고, 사과해" 이건 도대체 무슨 하이에나 같은 소리인가.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날 이리도 협박하는지. "..뭘 했는데요?" 내 눈은 바닥을 뚫을 듯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 인간들은 날 보면서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야 얘봐라, 뭐 이 딴 애가 다 있어?" 그 한마디를 끝으로 나는 위태롭게 서 공연하던 서커스 줄 위에서 끝없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3]- 언제부터일까, 내 마음의 조각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듯한 이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건. 핸드폰 배터리가 80퍼센트 남아있다. 지금 현재 내 마음의 상태도 80퍼센트 정도 멀쩡한 것 같다. 아직 버틸만 하지만, 조금은 아픈 상태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겠다. '오늘 낮 기온은 쌀쌀한 18도가 되겠는데요, 겉옷을 챙겨서 외출하시길 바랍니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날씨뉴스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이씨... 겉옷 안 챙겼는데.." 오늘따라 불쾌지수가 높은건 지 아무 이유없이 짜증나는 건지, 여러모로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생각이 많이 들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하기 전 횡단보도에 섰을 땐, 내가 보도블럭을 밟자마자 신호등은 빨갛게 변했고, 운동장에 들어서자 굵은 빗줄기가 화살처럼 내려꽂혔다.

교실에 들어선 내 모습은 처참했다. 머리는 엉켜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으며, 치마엔 물기들이 송골송골 맺혀 버티고 있었고, 이미 양말과 가방은 젖을 대로 다 젖어서 가방 안 교과서와 필기구는 한낱 쓰레기들이 되어버렸다.

내가봐도 내 모습은 영락없는 거지였다. 내가 반에서 발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옆 책상에 앉은 아이들은 날 힐끔힐끔 보면서 나에 대해 예길 시작한다. "쟤는 더럽게 물 다 묻히고 돌아다니나봐.""우리 반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진짜..." "으. 썩은내 난다." 자기들끼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곤소곤 말하는 거겠지만, 나한테 다 들리는 말들은 아까 맞은 비보다 더한 비수가 되어 마음에 꽂혔다.

[4]- 내 입으로 뭐라 하긴 좀 그렇지만 오늘은 내가 '하이에나' 무리에게 놀잇감이 된 지
꼭 50일이 된 날이다, 화창한 4월에 우중충한 화장실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이에나 무리에게 핍박을 당하고 있다.

"야, 우리 반에서 제일 못생긴 애 대답해 봐" "...." "대답하라고!!!!" "...어." "야ㅋㅋ 얘 말하는거 봤어? 못생긴 애 대답하라고 했더니 진짜 대답한다. ㅋㅋㅋ" 자기가 대답해라고 말했으면서 친구들이랑 시시덕거리는 모습이 정말 꼴불견이다.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갑자기 쑥스러운 듯 내게 얼굴을 붉히며 질문하는 하이에나, "내일.. 나 남친하고 투투데이야..." 그래서, 나더러 어떡하란 말인가! "그러니까, 너 내가 선물 골라 놓은 게 있는데." "..." "내꺼 간수 잘 할려고, 맞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자신이 고른 선물을 잘 간수 하겠다는 게 무슨 질문인가.. "응.. 간수 잘 해.." 나는 그때 보지 못했었다. 여전히 낄낄거리며 넘어질듯 웃고 있는 하이에나의 친구들을.

[5] - 의심스럽다. 국어시간인 1교시부터 하이에나는 쭉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있다. 2교시도, 3교시도, 4교시까지도 손에서 목걸이를 놓지 않고 있다.

"예들아, 나 오늘 남친하고 투투데이라서 목걸이 샀어! 어때..?" 발그레한 볼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에게 다가가서 상냥한 '척' 하는 하이에나가 싫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 학교라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나 같은 초식동물이 되지 않으려면, 하이에나의 비위를 맞춰 함께 놀아줘야 하니깐.

"ㅇ,어..? 예쁘다.." "어.. 잘 어울리네.. 오래가.." "예쁘네, 잘샀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이 학교의 학생들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목걸이 예쁘지?" 뜬금없이 내게 목걸이가 예쁘냐고 묻는 하이에나. 주위에 있던 친구들도 하나하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 목걸이는 예쁘지 않았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철덩어리에 나비큐빅이 붙은 목걸이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하이에나의 비위를 맞춰야 된다는 습관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딱딱한 말투로 하이에나의 말을 단칼에 받아쳤다.

내말이 끝나자 주변에 앉아있던 아이들의 안색이 파래진다. "풉" 하이에나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너 까짓 게 이 목걸이가 예쁘던 안 예쁘던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또 시작이다.
"야, 너 우리 반 공식 찐따야, 알고있지?" 라며 내 이마를 기분 나쁘게 손가락으로 툭툭 친다. "그냥 이상하던 안 이상하던 예쁘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래.. 너같이 아름답지도 않은 애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디가서 내 목걸이 이상하다고 말하지마" "넌 이 목걸이의 가치보다도 더 떨어지는 쓰레기니까." 속사포로 내게 랩하듯이 말로 휩쓸고 간 자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은 내게 경멸의 눈초리로 '어쩔거야, 왜 나댔어' 라며 내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난 도착했다. 바다의 가장 깊숙히 자리잡은 바닥에.

[6] - 아침부터 머리가 들끓는다. 오늘은 7월 14일. 해가 쨍쨍 내려쬐는 한여름이다.

"아으.. 머리야..." 어제 난 하이에나 무리에게 화장실에 가둬진 채 물벼락 세례를 맞았다.
덕분에 아침에 난 체온계 숫자인 40도와 해를 맞이했다. "엄..마.." 다 갈라진 목소리로 침대 모서리에 쭈그려 앉으면서 엄마를 불렀다. "어머! 딸.. 열나..?" 소리없이 들이닥친 엄마에게 난 속수무책으로 체온계를 빼앗겼고, 체온계 숫자를 본 엄마는 엄청나게 놀란 표정을 짓고 계셨다.

"어제 학교에서 물총놀이 했다더니... 열나는구나.." 물론 엄마께선 내가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신다. 당연히 어제 물 맞은 일도 학교에서 물총놀이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 이유? 간단하다. 엄마가 나 때문에 걱정하시면서 마음 졸이는 게 싫어서. "오늘 하루 학교 쉴래?" "아니 아니.. 그냥 갈래..." 그리고선 금방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향했다.

"딸!! 아침 안 먹고가?" "안 먹어!!" 안 먹는다는 말만 떵떵 했지, 현실은 매우 배가 고프다... 학교에 도착하니 웬일인지 하이에나가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 수상하지만, 인사는 했으니까 받아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안녕..?" 이라 했다.
하이에나는 나에게 지난번의 일을 사과하면서 친하게 지내자고, '친구'가 되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의심했지만 아무래도 친구하자고 하는 애를 내칠 순 없어서 형식적이지만, 친구가 되었다.

쉬는 시간 하이에나는 나에게 와서 빵을 건넸다. "먹어" "..?" "빵이야, 배고픈 것 같아서 준비했어." "어..고마워.." 작은 소보루 빵. 하이에나가 내게 처음 준 '선물' 은 '우웨에에에에엑'
유통기한이 지난 곰팡이 핀 빵이었다. "푸하하하하.. 야, 너 진짜 답답하다.." "으으..." "너는 어떻게 내가 주는 선물을 그냥 먹냐?"
이제 좀 학교 다닐 맛이 생겼다 싶었는데, 하이에나가 내게 준 선물은 낚시도구였다. 생에 처음 느껴본 곰팡이맛과, 10분째 하이에나와 하이에나 친구들 앞에서 변기통 부여잡고 속을 게워내고 있는 나는 누가봐도 수치스러웠고, 부끄러웠다.

"넌 순진한거니, 멍청한거니" 내게 비웃으며 의문문을 던지는 하이에나. "내가 너랑 친구를 한다고?" 또 목에서 쓰디쓴 위액이 올라온다. "웃기는 소리한다, 미쳤다고 너랑 친구를 하니." 그리고 난 한번 더 속을 게워냈다.

[7] - 점점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바다가 무서워진다. 물살에 휩쓸려 다니길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을 해도 가라앉지 못하는 이 바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기분이다.

날이 갈수록 학교에서 하이에나의 괴롭힘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가방에 터진 우유가 들어 있기를 수십번 반복하고, 손찌검을 당하길 수백번 반복하고, 아이들의 눈초리를 피해 도망가기만 수천번을 반복하는 나날을 보내는 나 자신이 점점 부끄러워진다.
사람이 세뇌당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었던 나지만, 지금은 내가 '너 학교에 왜 다니니?' 라는 말과 함께 학교에 다니고, 폭력을 당하는 내가 유죄인 듯 세뇌당하고 있었다. 지금 내 상태는 하이에나에게 끌려다니는 공기취급받는 그런, 학교에 누구마다 있는 왕따이다.

내가 새벽 4시쯤 신세를 한탄하며 아무도 모르게 우는 눈물 때문에 바닷속에서 점점 떠오르고 있다. 더욱더 컴컴한 육지 위로. 옛날에 바다 위는 새하얀 육지였는데.

[8] - 막막하다. 오늘은 내가 타고 갈 버스비까지 하이에나한테 뺏겨버렸다. 신발은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당최 보이질 않는다. 그거 몇 일 전에 엄마가 사준 새 신발이었는데...

"어디있지...." 자꾸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신발을 사주실 때 엄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꼭 아껴 써야 돼, 알지..?' 우리 집 형편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엄마께 어리광을 부린다.
저번부터 내가 예쁘다 예쁘다 했던 고가의 신발이 집에 있을 때, 나는 소리없이 밤을 지새면서 울어야만 했다. '우리집 형편이 좋지도 않은데 왜 이 신발이 예쁘다 했을까' 내게 새 신발을 건네던 엄마의 쓸쓸한 미소를 잊을 수 없어 다급한 마음으로 신발을 찾으려 맨발로 학교 안을 탐색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여유롭게 걸어오는 하이에나의 모습에 나는 기가 찰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토록 찾던 내 신발을 어울리지도 않게 하이에나가 신고 있는 모습. "내 신발 내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하이에나 앞에 선 내 모습. "아~ 이 신발 니꺼였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모습이 너무 가증스럽다. "어쩐지... 좀 싸구려 티도 나고.. 뭐야, 이거 짝퉁 아냐?"
갑자기 자신이 신고있던 내 신발을 벗더니 이리저리 둘러본다. "야, 이거 짝퉁인데?!" 라며 복도에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내 신발에 대해 광고하는 하이에나, "니가뭔데 내 신발에 대해 짓껄이는데!!!!!"

일쳤다. 하이에나 손에 있는 내 신발을 집어감과 동시에 다리를 쳐 넘어뜨렸다. "꺄아아아아악!!!" 남은 한 쪽 신발까지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난 이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앞에서 화난 듯 보이는 담임선생님과 넘어져서 우는 하이에나와 부축하는 무리들, 그리곤 옆에서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나에 대해 온갖 유언비어를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이 상황을 보고 꼭 맞는 말이 있다. '엿같은 상황'
선생님이 날 화난 목소리로 부르며 내게 다가왔지만,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학교를 무단이탈하고 집으로 도망쳐왔다. 그리곤 이른 시간에 온 날 놀라며 보는 엄마께 퉁명스러운 말만 내뱉고 부엌에서 엄마의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왜 나 신발사줬어?" "짜증나." 내 말을 들은 엄마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있었다.

엄마의 핸드폰을 찾은 나는 그대로 스팸 전화번호에 나, 그 외 아는 아줌마들 전화번호와 가족의 전화번호를 제외한 모든 전화번호를 넣어버렸다. 내 기억도 스팸함에 넣어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엄마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무슨 얘기를 하실지 다 알지만 들어야만 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가 휩쓸렸으니까. 내가 다 일을 벌여놓고 피하려고만 했으니까. "너 학교에서 무슨일 있었지." 정곡이 찔렸다. "빨리 말해" "...뭘.." "학교에 전화하기 전에 말해" "..아무 일 없었어"

그대로 엄마를 지나쳐 내 방에 들어와서 방문을 잠궜다. 그래고 다시 빠져들기 시작했다. 망상의 바다로, 다시 빠져든다. 그리고 난 생각한다.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이 올까'

[9] -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무뎌졌다면 무뎌진 내 왕따일기의 막을 내릴 때가 온 것 같다. 이제 그 서커스 외줄에서 떨어지는 것도 그만할 때다.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내 일방적인 당하는 폭력도 여기까지가 끝인 것 같다.

지금은 11월 2일. 눈이 내리고 있는 운동장 벌판에서 손을 녹이며 어김없이 학교로 향한다.
저 멀리 하이에나 무리가 보인다. 마주치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 돌고 돌아 교실에 도착했다. 교실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내 몸을 감쌌지만, 아이들의 냉랭한 눈빛은 그마저도 차갑게 만들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걸고 교과서를 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행동이 너무 낯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에 하이에나 무리는 날 불러 심부름을 시키거나 화장실로 불러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어째서 날 부르지 않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담담한 현실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저번에 신발사건도 그랬었다. 어떻게 한 건 지 다음날 학교에 갔을 땐 선생님들께서 날 대하는 태도도, 아이들이 날 대하는 태도도, 하이에나와 그 무리가 대하는 태도도 이상하리 만큼 변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심정 변화로 인해 내 마음은 잘 놀라지도 않고, 다 쓴 칼날같이 더욱 더 무뎌져 내렸고, 오늘 그 칼의 위태로운 칼질도 서걱대며 잘리던 내 마음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꿈을 꾸는 건가 팔을 꼬집어도, 칠판에 쓰인 날짜를 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달라진 것은 하이에나 무리들 뿐.

뒷자리 아이가 내 등을 연필로 쿡쿡 찔러댔다. 연필로 찌를 만큼 내 등은 그렇게 더럽지 않은데. "이거..." 아이가 내게 건낸 것은 다름 아닌 포스트잇이었다. 신경질적으로 휘갈겨 쓴 하이에나의 포스트잇. '옥상' 단 두 글자였지만 하이에나의 감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누가 봐도 '나 화났어요' 의 글씨체였고, 그 포스트잇을 건넨 아이의 손도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 내게 포스트잇을 건넨 아이에게 가볍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보는 아이의 고개가 가볍게 들렸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교과서 부록의 작은 편지지를 뜯었다. 그리고 긴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애가 내가 갔을 때 화내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편지를 쓰고 옥상에 올라갔을 땐, 이미 하이에나 무리가 도착해 있을 때였다.

"그만하자." 하이에나가 말을 꺼냈다. 그만하자고. "너 보기 싫어서 하는 말인데," "내 앞에서 사라져." "너 때문에 나 어제 엄마한테 혼났다고." 하이에나는 뜸 들이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어제 엄마한테 혼났다는 것은 이걸 뜻하는 것 같았다. 내 돈을 빼앗는 장면을 화장실 청소부 아주머니께서 보고서 학교에 신고한 것 같았다.
지금 꿈만 같은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엄청 느리게 말한다. "죽어 이 쓰레기야." 표정을 싹 바꾼 하이에나가 내게 다가오며 말한다. 죽으라고. 이미 예상은 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리고 난 옥상 난간 위에 서있다.

"ㅇ,야!! 너 진짜 죽냐?!!' 하이에나가 다급하게 물어온다. 왜, 네가 원하던 것이 내 죽음 아니었었나..? "왜? 죽어달라면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진짜 죽냐?! 그래!! 확 죽어!! 죽으라고!!!" 그 애의 말을 끝으로 난 뉴스에 나왔다.

'...어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00고등학교에 집단폭력으로 인한 학생이 자살해 큰 충격을 일으켰는데요, 자세한 소식 000기자에게 연결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0] - 엄마는 울고 있다. 아빠도 울고 있다. 난 사진속에서 웃고 있으며 지금도 웃고 있다. 학생증에서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사진이 흑백으로 프린팅 되어 큰 액자에 실렸다. 내 앞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국화꽃을 들고 있다.

난 나 혼자 있는 곳에서 보란 듯이 잘 살게. 하이에나야! 나 같은 왕따 만들지 말고 학교생활 잘 해. 내가 굉장히 안쓰러운 것 같지..? 난 힘든 게 아냐. 나랑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과 만나서 지금 행복한 상황이거든. 이곳에는 나 같은 친구들이 수백명이 넘더라..? 제발 너도 정신차리고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길 바라.
그리고 이 말을 끝으로 서커스 외줄에서 떨어짐을 멈추고 마냥 힘들 것만 같았던 내 앞에 놓인 운명을 내 무뎌진 칼로 잘라버렸다. 이것도 반항이라면 반항일까나..? 고개를 숙이고 팔다리를 오므린 채 깊은 바닷 속에 처박혀 버려 더욱 더 깊은 바닷 속에 가둬지길 바라던 나는, 휩쓸리고 휩쓸리다 수면 위에 떠오른 나는 다시 눈을 껌뻑일 수밖에 없었다.

전율이 흘렀다. 새하얀 천장. 보드라운 이불. 귓전을 때리는 알람소리. 아직 뜯기지 않은 3월달 달력. 촉촉한 벚꽃비가 내리는 3월 3일의 시작이었다.


                                ☆제2회 울진문학상 공모전- 중등부 최우수
                                 울진신문사 주최/ 동아베스텍(주)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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