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3  (일반부)


이윤정

               
4월에는 장님이 눈을 뜨듯
벚꽃들이 꽃눈을 열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니
우리가 환한 벚꽃들을
눈 뜬 장님처럼 바라봅니다
 
4월 어느 날
벚꽃은 진눈깨비가 되어
펄펄 떨어집니다

벚꽃의 낙화를 바라보는
우리들 마음도 어느 새
진눈깨비가 되어버립니다.



흙과 함께 살리라. (일반부)


장 상


나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추석 무렵, 사라호 태풍으로 잘 익은 벼 이삭들이 모두 매몰되어 아버지는 쓰러져 병원(대구 동산병원) 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못하여 천자문을 옆구리에 끼고 한문 서당을 다닐 때, 친구들은 검은 교복을 입고 집 앞을 지나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돈과 교육의 서러움을 알게 되었고 더욱 열심히 사는 것으로 마음 먹으며 자랐다.
  
중학 졸업 후, 돈이 없어 1년간 배추・ 고추농사로 고등학교 입학금을 마련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국립 사범 대학 수학과에 응시하였으나 농업고등학교에서 배운 교육과정(영어・수학 : 주 2시간)과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여 낙방한 후, 서울 남산 공원(남산 타워 위치) 정상에서 한없이 울며 내려와 장충동・금호동의 이발소를 전전하며 미래를 생각하였다.
 ‘나는 여기서 머물면 안 된다’는 결심으로 교육대학을 응시 하였다.

교대 졸업 후 벽지 지역 첫 발령을 받고 부임했을 때 분교 지역 주민 중 젊은이들은 나 자신을 학교장 홍보로 이미 태권도 유단자(공인 3단)를 알고 찾아왔다.
초임 당시, 면 5일장에 지역 주민 젊은이들이 갈 때마다, 장터 젊은이들은 산골에서 내려온 젊은이들의 농산물 판매액을 모조리 빼앗아 가는 시절이였으니, 얼마나 주먹이 그리웠을까.
동네 젊은이들이 밤에 찾아와 애걸하기에 운동장에 나무 지주를 세워 전기불에 태권도를 지도하며, 인성교육을 틈틈이 지도했다. 늦겨울이 될 무렵, 무예도 향상되어 5일 장날에 다녀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으며 돈도 빼앗기지 않았다. 젊은이들의 덕분에 학교 앞 채전 밭을 잘 운영하게 되었으며, 젊은이들과도 우애가 깊었으며 매주 일요일은 축구와 배구로 친목을 다졌다.

또한 매주 주말이면 농촌 일손 돕기와 학교 어린이들 이발과 서울 장충 중․고등학교와 자매결연으로 아동도서 수 천 권의 학교 도서실 비치와, 수 백벌의 의류・생활용품 등을 지역 주민들에게 베풀어 주며 삶의 향기를 넣어 주었다. 
열심히 근무한 탓인지는 몰라도 1년 후 다시 면 소재지 학교로 발령을 받고 몇 년 간 근무 중, 피맺힌 개인적인 사정으로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3형제를 안고 벽지 분교를 희망하게 되었다.
  
지역 주민 젊은이들의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매주 토요일은 봉사활동으로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일요일은 젊은이들을 위해 건강 체육의 날로 배구와 축구를 운영하며 파티도 마련해 주었다.
 
어린시절 시골 생활과 교직생활 시작부터 흙을 접해온 나로서는 정년을 하면서도 시골 생활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퇴직 10년 전부터 노후 생활의 정착지를 모색하여 지금의 생활 터에 머무르게 되었다.
삼라만상은 공기와 흙・물이 중요하지만, 기본은 흙이라고 본다. 옛 조상들은 맨발로 흙을 밟으며 살아온 것이 무병의 일생이 아니였을까? 
지난 초겨울 영하의 날씨에 채소밭에 김장 재료로 덜 정리한 무・배추가 있었다.

아침에 나가보니 뽑힌 무・배추는 시들어 약간 얼었으나 뽑히지 않은 것들은 싱싱하게 별로 얼지 않았다. 지온(地溫)과 흙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느끼게 되였으며, 토양의 소중함과 관리의 애착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작년에 김장 무가 여유 있어, 겨울 관리를 위해 구덩이에 옛날 방법으로 왕겨와 함께 묻고 볏 집단을 만들어 공기 구명을 만들어 설치하였고 다른 하나는 긴 함지박에 헌 이부자리로 넣어 뚜껑을 덮어두었다. 이른 봄에 열어본 결과 구덩이 것은 싱싱하였으나 함지박 것은 거의 썩고 바람이 들었다. 역시 흙의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였다. 나는 여름철이면 발 무좀이 심하다. TV에서 흙과의 접촉은 건강에 제일이라고 하여 맨발로 시행한 결과, 무좀 치료의 효과를 보게 되었다. 
  
퇴직 후, 농사일을 쉽게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역시 경험 부족이였다.
‘백문불여일견’ 보다는 현장 체험 경험이 더 중요함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인생살이는 경험에 의한 생각(발상)과 관리가 중요하다.
올해 5년차 귀농(귀촌) 생활을 하면서 6년차를 다짐해 본다. 모든 농민들도 동일한 생각을 갖으며, 또 한 해를 마무리 해 가면서 내년의 희망을 갖고 시작할 것이다.

물론 해마다의 경험을 하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공장 생산품 실패는 수시로 재생하기는 쉬워도, 농사의 한번 실패는 1년 후의 일이다. 
텃밭의 작은 채소 한 포기와 곡식 알갱이 한 개가 왜 그렇게 소중할까.
태양초 고추 말리기를 위해 주야로 신경 쓰며 노력해야함을 누가 알겠는가. 
  
아무리 농업 정책을 부르짖는 고급 이론자들은 체험 없는 탁상 머리들이 아닌가.
농민(주민의 대표인 조합장・군수・국회의원들은 당선을 위한 노력의 절반이라도 봉사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농업 생활은 저축 보다 생계가 어렵다. 대농업을 제외한 농민들은 순수입이 평당 1만원 이상이 되어야 한다.(천평에 천만원 정도라도 생활이 힘들다.)

지금 농민들은 고령자들이 많다. 농기계를 다루기 힘들며, 삽자루에 힘도 버겁다.
그러나 마음은 행복한 모습들이다. 자신이 먹는 채소와 곡식에 무 농해로, 신선한 공기와 샘물로 무병장수를 하고 있으니 그럴까?
 
흙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한다. 미래에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나는 술을 좋아하는 탓으로 여름철에는 막걸리 한 병(750ml)으로 오이・자두・살구・복숭아・사과・배 등의 안주와, 가을이면 단감・밤 등으로 해결하니 안주 값이 없어도 되며, 비육과 잡병에 신경 쓸 일이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의 정서가 중요하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생활 주변의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다.
욕심내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살면 된다’. 없어도 진솔된 마음으로 성실히 일하면 된다. 농촌 생활이 힘은 들지마는, 마음의 진솔된 생활 정서로 살면 된다.
 
며칠 전에 강원도 양구 평화의 댐 부근에 다녀왔다. 6・25를 생각하니 분위기가 엄습했으나, 친구는 야산(국유림)에 1만주 이상 장뇌삼을 심었으며, 내년에는 더욱 많이 심는다고 한다. 부푼 희망으로 흙과 함께 삶의 즐거움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친구의 모습을 감동하면서 돌아왔다.

농촌 생활은 자신의 농토가 없어도 된다.
생각(발상)과 노력이면 된다. 임대 대여를 소개해 주는 지역마다 농어촌 시․군 공사 지부가 있으며, 마을마다 임대 토지도 있다. 시골 임대 사랑방에서 1-2년 정도 지역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경제에 맞춰 귀농(귀촌) 준비를 하면 된다.
자신을 버리고 , 힘 든다는 생각 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라,
시골 생활이 너무 좋다. 지출이 많지 않으니, 과욕을 버리고, 없으면 없는 대로 흙과 함께 검소한 생활로 살면 된다.                    
 인간은 경험에 이상(理想)을 찾아 발전과 유지를 하게 된다.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발상)과 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 비전(vision)이 없을 것 같다.

올해 나는 많지 않은 농사를 위해, 참고 도서와 농업에 경험이 많은 분들의 조언과 귀농 교육을 받으면서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경험 부족으로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가까운 호수가의 물도 충분 했지만, 가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장마에 의한 배수 관리도 신경 쓰지 못했다. 농사는 물 관리만 잘해도 실패는 거의 없다고 본다.
또한, 유기질(녹비)비료를 준비하여 시비 못한 것도 매우 후회스럽다.
 
옛날 농사는 산에서 채취한 초목을 썰어서 퇴비장에 썩힌 후 유기질 비료로 사용하였으며, 농약・제초제가 없던 시절에는 병충해도 별로 없었으며 힘든 노동으로 논・밭매기 농사를 지어왔으니, 제초제가 필요없는 옥토 농토 관리법이 아니었든가.
물론, 많은 노동력으로 수확량은 적었으나, 주어진 수업에 맞춰 검소한 생활로 평화롭게 살아왔다. 
  
시골 인심은 근본적으로 후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범위에서 절약하며 성실한 인간 관계로 생활을 하고 있다. 시골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치관은 귀농인들의 생각과 행동은 다르다. 생활 습관과 타인이라는 거리감으로, 인간관계를 연계하지 못함이다. 내 스스로 노력하여 까까와지면 음식도 나눠 먹고 텃밭의 밭갈이(로터리)의 도움과 농산물 여러 모종들도 얻을 수 있다.

시골 산지 농산물 가격은 너무 싸다. 지난 해 김장 배추 시절 배추 한 포기에 700원 정도였지만, 시중에서는 2500원 정도였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농사를 짓는다. 정부에서 산지 농산물 직매 유통 방안이 시급하다.
 
나는 귀농(시골) 생활을 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이 너무 많다. 
시골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먹기 위해, 농약 살포를 하지 않아 볼품이 너무 없으며, 상품 가치가 안 되었다. 그러나 도시인들은 빛깔 좋고 몸매 좋은 것을 선호한다. 도시인들이 좋아 하는 농산물은 화학 비료와 농약을 많이 다루어야 한다. 도시인들은 비정상적인 농산물・가공식품을 섭취하면서 더 나은 건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예쁜 장미에 가시가 있음을 모르고.
 
호박꽃도 자세히 보면 너무나 아름다우며 빛깔도 좋다. 늙은 호박은 건강에도 더욱 좋고. 
 
도시 초등학교의 신입생은 줄어도 특수학급은 유지되고 있으며, 시골 학교는 특수 아동을 찾기 힘들다. 맑은 공기・자연산 식품・적당한 움직임이 건강의 비결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농촌 생활은 적당한 움직임이 아닌 무한한 육체적 노동력이지만, 도시 생활의 정신적 노동력도 만만치 않다.
티끌 하나 피하며, 춥다 ․ 덥다 하는 도시 어린이와, 흙먼지 마시며, 방한복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콧물 흘리며 뒹구는 시골 어린이들의 건강한 자람을 비교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인간은 자연을 멀리 하거나 떠나 살 수 없다. 자연적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인큐베이터(incubator)식 보호 생활은 더욱 멀리 해야 한다.
도시 부촌 마을의 병원은 유지되어도, 시골 중・도시 병원은 허덕인다고 한다. 
 
나는 시골 선택을 잘 하였으며, 매우 보람되고 행복함을 느낀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공통점은 하루해는 똑 같아도 나이 먹음과 죽음은 동일하다.
과욕과 허황된 꿈은 생명을 단축하며 권위를 잃을 수도 있다. 주어진 운명과 노력으로 진솔된 생활로 흙과 함께 삶며 자연인으로 사람답게 살아보자.



유 년 (일반부)


이향숙

추석을 맞아 친정으로 향하는 길, 들녘엔 제법 가을 향기가 묻어났다. 고향집 가까이 이르니 교통공사와 명절을 찾아 고향을 찾은 인파로 도로는 부산스러웠다. 한 시간 남짓 끝도 없이 늘어선 차들의 대열에 시달리다 지친 우리는 결국 옆 동네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동네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지척에 두고도 이사를 간 이후론 통 발길을 두지 않은 곳이었다. 뒷산 솔바람이 입과 코로 스며들어와 내 뇌리의 추억들을 뒤적거렸다. 굽어진 모퉁이를 돌아서니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러고 보니 선이네 집 감나무다. 나의 유년을 고스란히 품은 나무를 보자, 기억의 저편에서 내가 부러워하던, 하얀 토끼털 점퍼를 입은 다섯 살배기 꼬마아이가 반갑게 나를 잡아끌었다. 나의 첫 친구 선이. 그 희미한 기억을 쫓아 삼십 여년을 거슬러 오른다.

선이네 집은 우리 집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작은 사과밭 하나를 지나야 했다. 방 두 칸 딸린 초가집엔 홀어머니와 언니, 오빠 그리고 선이를 합하여 네 식구가 살았다. 우리는 먼 친척뻘 되었으며 선이의 어머니를 숙모라고 불렀다. 궁색한 살림임에도 나는 종종 그 집에서 저녁을 먹었고 숙모가 끓여주신 -탱자나무 밑에서 잘라온 원추리를 넣은- 된장국은 우리 어머니의 손맛보다 달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들에 일 나가고, 언니․오빠들은 학교에 가고. 초가집에 우리 둘만 남게 되면 주워 온 사금파리로 볕 잘 드는 장독대 앞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달맞이꽃 밥에 괭이밥 김치, 개망초꽃으로 전을 부쳐 한 상 잘 차려놓으면 한 명은 엄마가 되고 다른 한명은 아빠가 된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툇마루 다리 하나를 빌려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할 때도 있었고 들이나 산으로 다니며 놀이감을 찾기도 했다.

봄에는 나지막한 뒷산을 오가며 찔레를 꺾었다. 껍질을 솔솔 벗겨 한 입 베어 물면 시원하면서도 약간 떫은맛이 났다. 운이 좋은 날은 산딸기를 만나기도 했지만 길목에 있는 딸기들은 벌써 언니, 오빠들의 손을 탄 뒤여서 허탕 치기 일쑤였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아버지는 저녁에 집 앞 호수로 나가 통발을 놓았다. 가끔은 배를 띄워 그물을 치기도 하셨다. 다음날 아침이면 새우에 붕어, 중태기(버들치’를 고향에선 ‘중태기’라고 불렀다), 메기로 집안이 가득해 보였고 어떤 때는 내 키만 한 잉어를 잡아 올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뒷마당에 큰 수조를 만들어 물을 채우고 그것들을 넣어두셨다. 어느 날 그 앞에서 선이와 손을 씻다가 물고기도 깨끗이 씻겨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수조에 비누거품을 풀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양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큼지막한 빨래비누 하나를 통째로 집어넣었다. 결국 물고기는 모두 허연 배를 드러내고 돌아누웠지만 부모님께 혼이 난 기억은 없다. 아마도 선이가 공범이어서 그런 것 같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선이가 많이 애처로웠을 테니까…….

선이는 늦도록 숙모의 젖을 찾았다. 그러면 숙모는 다 큰 아이가 젖을 먹으면 되겠느냐고 나무라다가 못이기는 척 감나무 그늘에서 저고리 고름을 풀어 헤치고 젖을 물렸다. 아버지 없이, 그리고 생계를 위해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며 바쁘게 종종 걸음 쳤던 숙모는 그렇게라도 선이에게 모정을 떼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가끔 어머니께 선이의 소식을 전해들을 때가 있다. 선이가 중학교 3학년 되던 해에 숙모가 돌아가시고 선이는 고등학교 대신 산업체로 일을 하러 갔다고 한다. 이십 대에 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 두었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로 아이를 시댁에 맡겨두고 남의 식당을 전전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엄마도 없이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선이! 늘 정에 굶주린 아이처럼 엄마의 가슴을 찾던 선이는 그러한 이유로 나의 그 젖비린내 나는 기억 속에서 더욱 측은한 빛깔로 남아있다.

가을이 오면 선이네 집 감나무가 빨갛게 물들었다. 고사리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큰 감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는 가끔 인심 좋게 홍시를 떨어뜨려 줄 때도 있었지만 둘이서 고개를 쳐들고 군침을 삼킬 때가 더 많았다. 장대를 가져다 휘-휘 허공을 젓다가 힘에 부치면 조심스럽게 돌담을 밟고 올라가 옆에 있는 고욤나무로 향했다. 나무에 매달린 채 건포도같이 말라붙은 열매를 한 입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린 후엔 누가 더 멀리 보내나 시합이라도 하듯 씨앗을 후두두 뱉어냈다.

우리 집 옆엔 닥나무를 삶아내는 곳이 있었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으나 동네 사람들은 그 곳을 ‘닥구장’이라고 불렀다. 마을 어귀로 찬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곳에선 부지런히 연기가 올랐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나무의 껍질을 벗겼다. 닥나무 껍질은 주인이 거둬들여서 옆의 도랑물 속에 담가놓았다가 봄날 다시 겉껍질을 곱게 벗겨내어 한지를 만들고, 알몸을 들어낸 나무는 각자의 집으로 가져갔다. 집집마다 풍로나 연탄이 있긴 했지만 가마솥에 밥을 짓는 집이 더 많았고, 시골에선 아궁이를 지필 일이 허다했기에 닥나무는 겨울에 쓸 요긴한 땔감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겨우내 닥구장엔 늘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아궁이의 남은 불씨에 고구마나 감자를 구워 먹기 위해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그 날도 닥나무를 삶아내었고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선이와 나는 닥구장 한 귀퉁이에서 작은 양은주전자 하나를 발견했다. 목이 말랐었는지, 호기심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받아놓은 막걸리를 주전자 뚜껑에 부어 홀짝홀짝 마셔댔다. 뒷날 어머니께 들은 얘기로는 둘 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한 잔 더 먹고, 한 잔 더 먹자.”
라는 말을 연발하다 잠이 들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여도 웃음이 난다.

기억은 다시 일곱 살 때로 돌아가 있다. 선이와 감나무 아래서 감꽃을 주워 무명실에 꿰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냄비 하나를 내밀며 근처의 당숙어른 댁에 주고 오라고 하셨다. 냄비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심부름의 값으로 당숙모가 우리에게 떡 두 개를 주신 기억은 또렷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큰 떡을 선이가 갖고 작은 것을 내가 받게 되었다.
“우리 엄마가 시킨 내 심부름인데 왜 니가 더 큰 떡을 먹는데?”
“숙모가 이렇게 줬잖아. 그라고 니 혼자 심부름 했나? 나도 같이 갔다!”
내 심부름인데 선이가 큰 떡을 먹는 것이 못마땅했던 나는 선이와 옥신각신 말다툼이 일었다.
“니는 아직도 느그 엄마 젖 먹제? 얼레리 꼴레리다!”
“그라먼 니는? 니는 아직도 밤마다 오줌 싸잖아. 오줌싸개 메롱!”
기어이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말을 하곤 식식거리며 토라져서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다.
“선이 가시나, 내일부터 같이 노나 봐라. 절대 안 놀끼다. 그라고 맛있는 거 생겨도 앞으로 절대 안 줄끼다!”
깊은 밤, 나는 아직도 다 삭이지 못한 분을 토해내며 잠자리에 들었다.

간밤에 시작된 비는 아침이 되도록 그칠 줄 몰랐다. 우리 집 마당에 한가득 물이 고였다. 언니들도 불어난 빗물 탓에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무릎까지 차오른 누런 황톳물을 가르고 집으로 들어오셔서는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어머니와 무슨 근심을 나누셨다. 

다음날, 비가 그치고 마당도 다시 바닥을 드러냈다. 지난날의 감정일랑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침을 먹은 뒤 곧장 선이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은 텅 비어있었고 도로보다 많이 낮은 선이네 마당은 작은 연못 하나를 만들어놓았다. 어머니께서 물이 다 빠지면 돌아올 거라고 했다.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며칠이 지났을까? 마당의 물도 다 말랐지만 선이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부터 맛있는 것 생기면 내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데……. 아직 엄마 젖 먹는다고 다시는 놀지지도 않을 건데…….’ 하루에도 몇 번씩 선이가 돌아오지 않았을까 달려가 보았지만 헛걸음을 치고 왔다.

며칠이 더 흐른 뒤 선이네 사립문 앞에 트럭 한 대가 보였다. 반가움에 얼른 뛰어가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동무는 보이지 않은 채 낯선 아저씨 둘과 숙모가 집안의 짐을 죄다 끄집어내고 있었다. 난 그 때 이사가 뭔지 몰랐지만 이제 더 이상은 선이와 놀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울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웠다. 사방에 모든 것이 멈춰져 버리고 아무소리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숙모가 나를 깨웠다.
  “열 밤만 자고 올 테니 밥 잘 먹고 있거라.”
내 손에 누런 종이봉지에 든 건빵 한 봉지를 쥐어주셨다. 그러고는 트럭을 타고 내가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점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 말을 믿었지만 결국 선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초가집은 점점 흉물스럽게 변해갔다. 그리고 몇 년 뒤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우리도 옆 동네로 이사를 나왔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선이는 내 기억에서 차차 희미해져갔다. 

잠시 차를 멈추고 다가가자 볼품없는 고목의 감나무 한 그루가 나를 맞는다. 일부는 길이 되고 나머지는 텃밭으로 변한 선이네 집터 한 가장자리에서 그는 주인의 손길을 잃은 채 만삭의 몸을 이고, 이젠 제법 힘에 겨운 듯 견디지 못한 만큼의 무게를 어지럽게 떨구어 놓았다. 무슨 사연으로 모두 떠난 자리에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섰을까?

가만히 그를 품어본다. 굳은살 깊게 박혀버린 나무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아직 설익은 감 홍시 하나를 ‘툭’ 떨어뜨린다. 이대로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치고 뒤돌아보면 금방에라도 둥그런 초가집이 열리고 어디선가 내 동무 선이가 까르르 웃으며 달려 나올 것만 같다.  
 



할매 쌈지 (일반부)


김정현


형이 미국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할머니는 우는 일이 부쩍 늘었다. 처음에 식구들은 할머니가 충격을 받을까봐 유학 얘기는 쏙 빼고, 손주가 실력이 좋아 미국 사람들이 불러서 한해 동안만 있다 돌아온다고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의의 거짓말도 오래 갈 수는 없다. 노인정에 가서 맏손자의 도미(渡美) 소식을 꺼낸 할머니에게 다들 한 마디씩을 보탠 모양이다.
“손주가 박사 공부 가는 모양이쎄.”
“그케, 우리 딸이랑 사우랑도 마카 가서 산제 안 오니더.”
“미국서 멫 해나 있능게로?”
할머니는 마지막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으리라. 노인정에서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 할머니는 다들 자기를 속였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틈만 나면 울면서 미국 가는 형 얘기를 했다. 멀리 사는 고모들은 푸념과 눈물을 쏟아내는 할머니 전화에 전보다 더 자주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저러나 올해 아흔인 할머니는 흔한 말로 정정하다. 식사도 잘 하고, 거동에도 무리가 없이 하루를 보낸다. 치매 징후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손주들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거의 안 보인다고 언젠가 엄마는 말했다.
곧잘 웃다가, 또 곧잘 울다가, 욕지거리를 내뱉다가도 금세 화를 푸는 모습을 보면 할머니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있다. 예컨대 모처럼 손주들이 오면 할머니는 시장으로 부엌으로 오가며 분주해지는데, 그러면 엄마는 할머니한테 다 먹지도 않을 음식을 한다고 퉁을 놓는다. 실제로 양이 많거나 입맛에 안 맞아 버리는 일이 다반사니까. 그러면 할머니는 첨엔 맞대거리를 하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결국엔 살림의 실권을 잡고 있는 어머니의 명분과 말발에 밀리고 만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나면 할머니는 거실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다 들리는 소리로 이런저런 욕을 늘어놓는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누구 욕을 그렇게 하냐며 슬쩍 지르면 할머니는 시침을 뚝 떼고 곧 방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방에선 섧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걸 다 목격한 내가 내심 걱정이 돼서 방으로 들어가면 할머니는 언제 그런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이, 둘째 고모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할머니는 몸도 건강하다. 입으로는 “눈이 잘 안 비케서”, “귀가 미에서” 하면서도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는다. 몇 해 전까지는 무릎이 아프단 소리도 부쩍 자주 했는데, 어느 샌가부터 그 말이 쑥 들어갔다. 이미 한참 전에 관절 연골이 다 닳아 없어졌을 게 분명한데 말이다. 노화의 어느 지점에 사람 몸이 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인체의 신비다.

서울에서 지내온 나는 울진 집에 있는 동안에는 괜히 할머니 방을 들르는 습관이 있다. 요즘살이가 아파트라 옛집[韓屋]처럼 따로 낸 방이랄 게 없으니, 들른다는 말보다는 그냥 들어가본다는 것이 사실은 옳은 표현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도 할머니는 집안의 최연장자일뿐 아니라 나를 키워낸 은인 아닌가. 따라서 할머니 방은 그냥 들락거린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방은 아닌 것이다.

방에 들어가면 저녁놀이 어둑하게 창가로 들이치는 가운데 티브이를 보거나, 시간의 더께가 쌓인 오랜 몸을 돌려누운 모습의 할머니가 있다. 내가 그 옆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보면 어느새랄 것도 없이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옛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대부분 수도 없이 반복해 들은 것들이라 나는 첫머리만 들어도 뒷내용은 훤했다. 할머니는 자기 얘기는 별로 안 하고, 지금은 못 보는 친척이나 옛 동네 사람들 얘기를 자주 꺼냈다. 그 속엔 사위어가는 삶의 말미에 느끼는 서운함, 아쉬움, 그리움, 그리고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옛 세대의 한이 서려 있었다.

서울로 가기 전날이면 할머니는 엄마 눈치를 보며 나를 방으로 부른다. 그리고는 쌈지를 끌러 그간 모아놓은 용돈이며 노인연금 남은 것을 내 손에 쥐어준다. 형이랑 나눠서 용돈으로 쓰라는 것이다. 나는 됐다고 손사래를 치며 안 받으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할머니 뜻대로 된다. 돈이 궁하지 않은 나는 그 돈을 잠시 동안만 갖고 있다가 할머니와 작별하고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어머니한테 넘기곤 했다.

올해는 받은 돈을 아예 할머니 쌈지에 도로 넣어두었다. 그런데 조금 이따 보니 할머니가 아까 돈 줄 때와 똑같은 모양으로 말없이 표정과 손짓으로 나를 긴히 부르더니 또다시 돈을 건넨다. 내가 쌈지에 도로 넣어두었던 그 돈이다. 나도 고집이 있어서 이번에는 할머니 방 텔레비전 옆에 돈을 슬쩍 놓아두고 나왔다. 그러자 또 ‘손주들 줄 돈’을 발견한 할머니가 이번에는 형을 방으로 부른다. 그렇게 할매 쌈지에서는 돈이 끝도 없이 나온다. 버스터미널 가는 길에 그 이야길 했더니 다들 웃는다.
할머니 쌈짓돈으로 실랑이 할 날이 앞으로도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버스 타고 서울 오는 길에 속으로 속으로 기도를 했다.



울 아부지, 보고 싶어요! (일반부)


이명희


오는 8월14일(음력 7월19일)이면, 아버지 당신이 제 곁을 떠나신지 25년째. 당신의 기일입니다. 아버지, 당신을 떠올림에 평생 먹먹함에서 조금은 편해진 듯, 이제야 당신의 추억 보따리를 풀어 보렵니다.

- 웃지도 못할 슬픈 보따리 (아픔)

평소에도 협압이 높으셔서 고혈압 약과 케일즙을 챙겨 드시던 기억이 납니다. 단, 매일 매일 꾸준히 몇 달도 아니고.
몸이 찌뿌뚱 이상 징후가 느껴지면 한 번씩, 반짝 며칠씩, 암튼 이런 분이 성격 또한 다혈질이라...
“쌀 한 됫박을 갖고 밥으로 한 끼 배터지게 묵지, 죽으로 한 달을 연명하고 싶진 않다.” 는,
늘 ‘인생은 굵고 짧게!’ 를 내뱉으셨습니다.

이러시던 분이 고스톱을 엄청시리 좋아하셨는데, 첨으로 고혈압으로 쓰러지던 날도 친구분들과 점 백 고스톱을 치다가 울 아부지 3점으로 났는데, 늘 부르짖는 말 “인생 뭐 별거 있나 죽어도 고! ” 란다.
아이쿠야! 바로 다음 분이 나서리, 일명 바가지를 쓰게 된 상황이 된거죠. 울 아부지 열 받아 그 자리에서 쓰러져뿟다네요.

울 아부지 택시에 태워져 포항 병원으로 넵다 달리는데, 울진군과 영덕군 경계 지경검문소를 통과하기 바로 직전, 아무 일 없듯 머리를 탈탈 털고 일어나시더라네요.
이때가 2월쯤이었는데, 그 이후로도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은 고스톱 판이 벌어진 풍경이라니...
그 사연은 형제 중 둘째인 울 아부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근처에 살고 있는 작은 아버지들이 고기니 과일 등을 한 가지씩 사들고 와서는 온 가족이 저녁식사 하는 분위기에서, 의례 밥상 물리고는 형제들끼리 고스톱 판으로 마무리를!

이런 일상생활 중에, 그 해 여름 서울에서 큰 아버지 식구들이 울 집으로 휴가를 내려왔는데, 당연히 이어지는 형제들 간의 고스톱 판에서 울 아부지 먼저 3점으로 났네요.
절대 스톱하실 분이 아닌지라 “못 먹어도 고!” 하여 한 바퀴 돌고 박 씌우는 사람 없어 울 아부지 차례가 되자, 울 아부지 위풍당당 7(일명, 홍싸리)을 들고 내리쳐서 낚아채려는 순간.

아뿔사! 화투장 뒤집는 손이 벌벌 떨리면서 7이 그대로 나동댕이 쳐지는데, 속된말로 설사를 한 거죠. 울 아부지 혈압으로 그대로 쓰러져뿟어요. 2월에 쓰러졌을 때처럼 택시를 태워 포항 병원으로 향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또 울진군을 벗어나기 직전, 지경검문서를 통과하기전에 탈탈 털고 일어나신 거여요.
주위에서는 이 와중에도 울 아부지 평생 울진군을 벗어나지 못하는 고향사랑, 울진사랑을 입에 오르내렸답니다.

암튼 이때가 두 번째 쓰러진 거였는데...
고혈압으로 한 해에 두 번 쓰러지면 세 번째는 돌아가시는 거라는 소릴 들은 적 있어서, 그때부터는 엄마도 나도 그리고 아부지 본인도 바짝 신경을 썼지요. 매일같이 잊지 않고 고혈압 약과 케일 즙을 챙겨서 드시게 하고, 술도 못 드시게 하고...
하지만 고스톱은 따라다니면서 감시를 할 수도 없고, 친구분들하고 놀이삼아 치는 점 백짜리를 막을 수는 없었지요.

울 아부지 가신 날은 울 아부지 생신날! 친구분들과 고스톱치고, 술도 한 잔 하시고 거나하게 초저녁에 들어오셔서는 한 숨 푹 주무시더니, 밤 11시쯤에 “명희야!” 크게 한 번 부르시고는 그대로 숨을 거뒀네요.
밑도 끝도 없이 말이예요. 너무나 기가 막히게 말이예요. 너무나 허망하게 말이예요. 옛 어른들 왈 “생일날 저 세상으로 가는 건 원도한도 없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럴까요? 결론은 울 아부지 그 해 세 번째 쓰러지던 날, 그것도 고스톱 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형제 어느 누구도 고스톱을 치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8월14일 아버지 기일엔 아버지 영정 앞에서 초저녁잔 부어놓고 아버지를 추억하며, 감히 고스톱 한 판 칠 수 있을까요?


-남자 중의 상남자 보따리 (그리움)

울 아부지 살아생전 직업은 수협위판장의 33번 중매인! 고깃배들이 생선을 잡아 부두에 들어오면, 수협의 주관하에 중매인들이 값을 쓰면, 가장 높이 쓴 중매인에게로 낙찰되지요.
울 아부지는 이 바닥에서도 성격대로 그 옛날 매점매석에 일조를 하신 듯... 위판장에 들어오는 생선은 있는 대로 울 아부지 손으로 다 사들여서 생선 값을 울 아부지 손에서 쥐락펴락해야 성이 차는 배짱 두둑한 장사치였지요.

어느 한 날은 그때만 해도 물반 고기반으로 어장이 넘치던 시절. 꽁치가 한창인 한 겨울에 꽁치를 몇 톤 짜리인줄은 모르나, 생선 트럭 중 가장 큰 트럭에 바리바리 싣고 전라도 이리(현, 익산) 땅에 팔러 넘어 갔더랍니다.

후포에서 오후 6시쯤 출발하면 가다 쉬다 이리 땅을 새벽 2시쯤에 도착해서 생선 내리고 어쩌고 저쩌고 진열까지 하면, 새벽4시쯤에 입찰에 들어가는데, 아, 글쎄... 생선트럭이 이리 위판장에 도착하니 너댓명의 남정네들이 꽉 에워싸서는 생선을 못 내리게 하더라네요.

이유인즉슨! 감히 갱상도 놈이 겁대가리도 없이 전라도 땅에 물건을 팔러 기어 들어와? 이거죠. 요즘에야 동서화합으로 서로 어깨 얼싸안고 사진 팍팍 찍는 시대지만, 그때만 하여도 뼛속까지 골이 깊은 지역감정으로 사돈도 안 맺을 정도로 으르렁 댔던 시절이라...

어찌되었거나 그렇다고 그 멀리까지 가서 고분고분 돌아올 울 아부지 아니지요. 두 주먹 불끈 쥐고는 눈에 불을 켜고 어판장에 널부러져 있는 마뚜리(광주리), 하꼬(상자)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서, “다 덤벼!” 라며 막막 휘둘렀다네요.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 일단 쪽수로도 밀리고, 똥개도 지 집 앞이면 오십 점 따고 들어간다는 말도 있는 데 한참을 정신도 못차리고 박살나고 있는데, 이용 !이용! 시커먼 백차가 턱 서더니 다짜고짜 울 아부질 태워 파출소로 데려 가더랍니다.

파출소 안에 들어서니 울 아부지 정신이 확 들더라네요. 아이코야! 여~가 전라도 땅이지! 순간적으로 퍼뜩 떠오르는 뭔가가 있어 순경한테 전화 한 통만 하자고 통 사정을 해서 겨우겨우 연결하고 한참을 목 빼고 기다리는데, 또 한번의 이용! 이용! 시커먼 백차 한 대가 턱 하니 서더니, 이번엔 울 아부지를 구출해서 파출소를 유유히 빠져 나갔답니다.

그길로 요정인가 뭔가에 가서는 그 밤이 새도록, 그 밤의 끝을 부여잡고 부어라 마셔라! 트럭에 실린 꽁치는 식혜가 되었는지 뭐가 되었는지 아랑 곳 없이...
7년 전부턴가 나는 재경 울진군민회니, 면민회니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울 아부지 친구, 선배, 후배분들을 많이 만날 기회가 되었다.

울 아부지 함자를 대면서 인사를 올리면, 한 분 한 분 하나 같이들 내 손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울 아부지 추억담을 하나, 둘 말씀해 주신다.
하시는 말씀들이 울진군내에서 울 아부지한테 한 대도 안 맞은 사람이 없을 만큼 거칠었는데 ... 그러면서도 너무도 정 많고, 눈물도 많은 의리 있는 남자 중의 남자! 요샛말로 상남자였다고.
“어허이, 친구! 세월이 이렇게 흘러 친구 자네 딸래미와 술잔을 주고 받구나! 보고 싶으이 친구!”
이런 그리움으로 울 아부지 친구 분들과 1년에 한 번씩은 식사 대접하고 술 한 잔 같이 합니다.

- 아이스크림 만큼 부드러운 보따리 (행복)

내 고향 후포에 아이스크림 집이라고 첨 들어선 곳이 빙그레의 전신인 -퍼모스트-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밤중에 한참 잠들어 있는 사남매를 깨워서 내미는 투박한 울 아부지 손에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이 들려있다. 눈 비비며 보고 또 봐도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다. 비몽사몽간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울 사남매 앞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 “우리 집이 비록 떵떵거리며 잘 사는 부자집은 아닐지라도, 후포 바닥에 첨 들어온 아이스크림을 가장 먼저 내 새끼들한테 멕여 주고 싶어서 사왔다. 아나, 먹어봐라!”
자다 깨서 정신도 없이 허겁지겁 입으로 들어가는데 그 맛이란 아~ 신세계였다. 세상의 행복 그 자체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 어린 나이에 첨으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 올렸던 거 같다.
고로, 내게 있어서 아이스크림은 곧 행복이다. 그전에 길거리에서의 딱딱한 팥 아이스깨끼와는 차원이 틀리는. 부드러움이 혀끝을 감돌아 사람 자체를 녹여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나는 눈 오는 한 겨울 밤이면 아이스크림을 찾는다. 울 아부지와의 행복한 추억여행을 떠난다. 무뚝뚝한 울 아부지 내면의 부드러움을 먹는다.
.
.
아부지, 아부지, 울 아부지 당신이 몹시 그립습니다. 당신이 참 많이 보고 싶습니다.



제비꽃 (고등부)

정선검


길가에 제비꽃 하나
아무런 손길 없이
어여쁘게 피어난다.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이들 밀어내고

바람 불면
위태로이 고개 숙이고

비가 오면
폭삭 젖어 바들거리며
그렇게 저 혼자 피어난다.

길가에 어여쁜 제비꽃
따뜻한 손길마저
어색하게 피어난다.



죽 한 그릇 (고등부)


노현지


몸이 아파 어머니가 누우시고
나는 쟁반에 죽 한 그릇 들고 있다.
어머니가 일어나 죽을 드시니
이제야 안심되어 웃음이 난다.

이때 죽 위로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어머니의 뺨 위로 눈물이 흐른다.
왜그러시냐  여쭈어 보니
옛 생각에 눈물이 흐르신단다.

어머니 어릴 적 아프셨을 때
할머니는 항상 죽을 끓여 주셨다.
그 시절 가난하여 그저 흰죽 이였으나
간장 한 방울 넣어 맛있게 드셨단다.

세월이 흘러 지금 어머니 앞에는
알록달록한 죽이 있지만
어릴 적 먹던 그 흰죽과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흐른다.

어머니의 눈물로 간을 한 죽
그 죽을 다 드신 뒤 어머니는 다시 눕는다.
나의 어머니가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고 계신다.



타인 (고등부)


김세영


모든 사람들은 타인이라서
마치 갓난아기의 옹알이 처럼
혼자만의 고독한 외로움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타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걷는다

보도블럭에 떨어지는 메마른 소금결정

그러다가 물이 돌 가르듯

가면이 조각조각 갈라져서
얼굴이 나타나도

모든 사람들은 타인이라서

마치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혼자만의 거슬리는 울음소리



19박 20일간의 새로운 도전을 마치고 (중등부)


정윤진

1학기가 반 정도 지나갈 즈음,나는 옆 반 담임선생님께 삼성드림클래스 추천을 받고 7월24일부터 8월 13일까지 19박 20일로 경북대에 가게 되었다.
그곳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너무나 많았고,시골에서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던 나는 ‘아, 내가 정말 우물 안 개구리 였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1학년 9반이었고,수학,영어A,영어B로 나누어져 하루 평균 4시간 이상의 수업을 받았다. 한번도 공부학원을 다녀보지 않은 나라서 학교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몇 시간동안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경험들이 너무 새로웠다.
3명의 멘토선생님들께서도 나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 주셨고 정말 친언니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셔서 너무 좋았다.

그곳에서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해설 있는 오페라도 보고, 부산까지 가서 비오는 날에 축구도 보고, 충남대까지 가서 2014 열정락서도 보고, 공부의 신 강성태에게 진로특강도 받아보고, 사하라 사막과 남극,북극을 다녀온 유지성에게 진로특강을 받는 경험등등 나는 평생에 해보지 못할 것들을 3주 안에 많이 해 보았던 것 같다.

액티비티 시간에는 다른반과 모여 합창을 연습하고 마지막날 수료식 때 무대에 서서 라이온  킹, 이젠 안녕 이란 노래를 불렀는데,연습할 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막상 무대에서 노래를 하니 많이 떨리진 않았고 사람들이 호응을 잘 해주어서 그동안 힘들게 연습했던 것들이 생각나면서 뿌듯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19박 20일간 경북대를 갔다오면서 아직 중학생 밖에 안 되었는데 대학교까지 갔다 온 나 스스로도 너무 대견했고 멘토선생님들이 써 주신 편지를 읽으면서 나도 커서 멘토선생님들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유명한 대학교를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로특강을 듣고 나서도 어떻게 내가 공부해야 하는지도 잘 알게 되어서 좋았고,마지막 수료식 때 우리가 3주동안 150시간을 공부했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가 열심히 했던 시간들이 그렇게 많았구나’하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주동안 2학기 공부한 것들을 헛되이 쓰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2학기때에는 성적을 더 올려야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비록 3주동안 삼성 드림클래스를 갔다와서 여름방학은 다 보냈지만 ‘나는 누구보다 특별한 여름방학을 보냈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나의 미래에 대한 꿈들도 더 명확해 진 것 같아 매우 만족한다.나는 3주동안 경북대에 갔다 왔던 삼성드림클래스를 바탕으로 내 꿈을 이루는 데에 무수히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삼성드림클래스는 나에게,내가 커서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도 기회가 생긴다면  꼭 참여할 것이다.



울진관광 (중등부)


전영옥


우리가족은 일년에 한번씩 여름에 모든친척이 모여서 여행을 간다. 이번여행은 내가살게된 울진이였다. 첨에는 할곳도없는 울진에 왜있는지 이해가안됐다. 그래서 투덜투덜 거렸다.

처음에 우리가 가게된곳은 성류굴 생각해보니깐 꽤 울진에 가까운 죽변에 살면서 성류굴은 아주어릴때 말고는 처음이였다. 그리고 어렷을때도 무섭다는생각에 들어가지 않았다. 성류굴은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동굴이다. 성류굴은 입장료도 받았다.
울진사람은 50% 할인으로 중학생인나는 천원에 들어갈수있다. 성류굴은 천연기념물 제155로이다. 다관람하고 나오면 왜 천연 기념물인지 알수있을 것이다. 성류굴은 전체적으로 북동방향으로 수평하게 발달한 석회동굴이다.

성류굴 내부에는 여러지점에 호수가 있으며, 이중에서 3개의 호수는 규모가 큰편이다. 주 통로의 길이는 약 330m이며 주통로로부터 연결된 가지굴의 길이는 약 540m로, 이 동굴의 총연장은 약870m에 이른다. 이중에서 약 270m의 구간이 일반인에게 공개되어있다.
성류굴을 들어가니 시원하고 나중에는 춥기까지 한것같았다. 그래도 여름이라서 그런지 시원한게 너무너무 좋았다.  종류석들은 웅~~~~~~장해보였다.

눈으로보면 자연의 힘이 정말멋있고 대단하다는걸 느낄수 있었다. 동굴답게 박쥐모양으로 설명도 되어있었다. 그러면서 더들어가보니 박쥐도 있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꼼짝을 못했는데 나중에는 또보이면 반가워서 막웃다가 없으면 섭섭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여자라서 그런지 나는 로마의 궁전이라는곳이 제일 좋았다. 그냥 딱보면 로마의 궁전처럼 생겼다. 진짜 신기했다. 성류굴은 정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와서 배가 고파가지고 주차장 쪽에있는 음식에갔다. 원래 빙어튀김을 좋아하는데 빙어튀김 있길래 그거랑 다슬기를 먹었다. 배고파서 그런지 너무맛있었다.

동생은 조그만한 핑크색 가방을 샀고 어른들은 목시원하게 하는 안마기구를 샀다. 배 든든히 채운 다음 우리는 울진 민물고기 생태체험관에 갔다. 민물고기 생태체험관은 매주월요일은쉬고 설,추석 연휴에도 쉰다. 요금은 어른이 3000원 학생이2000원 어린이가 1500원이였다. 난 2000원을내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물고기가 보였다. 난물고기를 엄청좋아해서 집에서도 키운다.

그래서 반가워서 물고기를 보자마자 뭔가 막 기뻤다. 막 물고기들은 사람을 알아보고 내가 가니깐 내쪽으로 막몰렸다. 좀 징그러우면서 귀여웠다. 민물고기 생태체험관도 유치원때 와보고 너무오랜만에 왔는데 엄청 많이 바껴있었다. 입구쪽에 수달도 있었다. 막 수달이 사람들한테 인사하는데 너무 싱기방기 했다. 안으로 들어가니깐 물고기에 대해서도 많이 적혀있었다.

물고기들을 먹는 생태계포식자들 이러한 것들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잘지내는 토박이 물고기들을 먹어치우거나, 먹이나 서식지를 빼앗는 등 고유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생물들이다. 블루길,붉은귀거북,떡붕어,황소개구리, 큰입배스가 있다. 블루길은 일명 파랑볼우럭이라고 불리는 미국산 외래종인데 생긴것도 뭐든지 다먹고 욕심많게 생겼다.
황소개구리는 많이 들어본건데 우리나라에는 천적이 거의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곤충, 물고기, 토종 개구리, 뱀까지 잡아먹는 탐식성 양서류로 생태계 먹이 사슬을 교란할 우려가 있어 방생금지다. 이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니깐 물고기랑 사진찍을수 있는곳이 있었다.

막 안으로 들어가니깐 조그만한 금붕어가 내눈앞에 지나가니깐 너무신기했다. 그래서 엄마보고 찍어돌라해서 한 장찍었다. 좀가면 큰수족관에 아주크은 민물고기들이 많았다. 통통하고 물고기가아닌 상어처럼생겨서 무서웠다. 수염난 물고기도 있고 꼬리가 뾰족하거나 붕어처럼 뿔어 터진 물고기도 있었다.
너무 웃기고 신기하고 재밌었다. 상어가 보고 싶어서 두리번거리다 상어를 봤다. 완전 무섭게 이빨뾰족하고 그랬는데 내가 생각한것 만큼 엄청 크진 않았다. 그냥 귀여웠다. 그리고 내가 집에 키우는 물고기가 베타인데 아주 조그만 한데 여기 베타는 진짜 컸다.

너무 놀래서 나두 저만큼 키워서 수족관에서 키워야 될 때가 되면 여기에 갖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오면 열대어 전시관과 물고기들 한테 먹이주는 곳이 있었다.
열대어전시관은 아기자기하고 얼마나 이쁜 수족관으로 대어 있는지 집에도 저런 수족관이 있었음 조켓다라고 볼때마다 생각했다. 항아리 수족관도 있었는데 실용성 있어보이고 너무 이뻤다. 물고기 먹이를 주기위해서 500원짜리 먹이 한통을사서 물고기한테 먹이를 주러갔다. 처음에 주황색 물고기들한테 먹이주러 갔는데 물고기들이 지들한테 먹이주는걸알고 막 내쪽으로 다 몰렸었다.

당황당황하다가 기분 좋아져서 앞에 물고기들한테 주니깐 조금쎈 물고기들인지 계속 먹이 먹는것들만 먹어서 뒤에 물고기들이 못 먹길래 뒤에도 뿌리고 저쪽에도 뿌리고 이쪽에도 뿌리고 이러다보니깐 이물고기들한테만 먹이를 다써버려서 다시 먹이를 사서 다른 물고기한테 갔다. 다른 물고기들 한테는 그냥중간에 밥조금씩 뿌려줬다.

진짜 밥주니깐 엄청많은 물고기가 한곳에 몰리는데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러고나서 생각해보니 그많은 물고기들한테 밥 조금준게 너무미안했다. 아무튼 민물고기 생태체험관도 너무 재밌었다. 나처럼 물고기 좋아하는 사람이가면 정말 좋은곳이다. 

울진에 할거 없다고 처음에 막 짜증부리고 그랬는데 신기한 곳도 많고 울진도 여행지로 놀기 좋은곳 이란걸 깨달았다. 오늘 두 곳다 너무 재밌었고 성류굴은 정말 멋있었다. 그런 곳들이 울진에 있는게 너무 자랑스럽고 울진사람 인게 너무 뿌듯했다. 울진은 관광지로 정말 좋은 곳인것 같다. 



독도 앞 바다 (중등부)


한서진
                

독도 앞 바다는 날마다
하얀 거품을 물고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고

독도 앞 바다는 날마다
우리들에게 힘을 키워 달라고
온 몸으로 철썩철썩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독도 앞 바다는 날마다
우리의 땅이니 빼앗기지 말아달라고
온 몸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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