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4


나는 목욕탕 내에 있는 이발소를 자주 이용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탕에 가는 데 목욕하기 전에 이발하는 것이 편하다. 내가 지금 머리를 깎는 곳은 5년째 단골로 가는 이발소이다.

이발소 벽면에는 기능장 1급 자격증이 걸려 있다. 인정받은 이발 기술은 내 마음에 꼭 맞게 머리를 깎아 준다. 이발 요금은 9,000원, 머리 깎는 시간은 20여 분이 소요된다. 이발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이발사는 담배는 아예 배우지 않았고 술도 체질에 맞지 않아서 한 잔도 마시지 못한다고 한다. 아주 성실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그는 어렸을 적 가정형편이 아주 어려웠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전쟁까지 일어나자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14살이 되자 이발소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했다. 17살 어린 나이에 독립하여 동대문시장에 이발소를 차렸다.

이발소에서 번 돈으로 동생들과 자녀들까지 대학에 보냈다며, 지나온 시간을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건사해야 하는 식솔이 자그마치 11명이나 되었다. ‘대학까지 모두 보냈으니 얼마나 고단하게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먹고 살만한 돈은 벌어둔 것 같고 고향에도 적지 않은 땅을 마련해 두었다고 하였다.

그는 올해 71세이다. 지금도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저녁 8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간다. 주말에도 일을 하러 나오는 성실함을 아직도 못 버리고 산다. 아침과 점심은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해결할 정도다.

나는 가끔 그에게 “쉬어가면서 일하시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시죠”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일해야죠. 몇 년 전에 자식들이 일을 그만두라는 성화에 몇 달을 쉬어봤는데, 갑갑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요” 라고 했다. 그는 일하지 않고는 못 살 사람처럼 보였다. 이발사는 그에게 직업이라기보다 삶을 구원하는 종교가 아닐까.

얼마 전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분당에서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서 이발소가 있는 골목길을 들어섰다. 한참 걸어오는데 눈에 뭔가 부딪치며 번쩍 하더니, 눈알이 빠질 듯이 아팠다. 어둠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골목 한가운데에 목재를 실은 트럭이 가로막고 있었고 목재에서 삐져나온 날카로운 가지 부분에 눈두덩이가 찔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가 치밀었다. “차를 길 가장자리에 주차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이 자식이 전날 술을 많이 마셨나. 길 중앙에 차를 주차해 두다니, 망할 자식” 분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차 뒤에 실린 망치를 보고, 차 유리와 범퍼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분이 풀릴 때까지 찌그러뜨렸다. 그는 자기 눈을 만지며 큰일 날 뻔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나도 그 말에 덩달아 웃었다.

매일 그 시간, 그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일하는 그 남자. 게으름 필줄 모르고 오늘도 내일도 자리를 지키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힘들어 보이고 안쓰러워 보인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그를 살게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발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장인정신을 갖고 산다.
단순히 사람의 머리를 만지고 수염을 면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손님의 말벗이 되고 자신의 기술과 실력으로 손님의 외모를 단정히 다듬어 주는 사람. 그러다가 하나 둘 단골손님이 생기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기 마련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겨우 이발사 주제에’ 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 년을 이발사로 묵묵히 살아온 그의 직업을 누가 폄하할 수 있을까.

그는 어려운 시절을 겪어온 세대라 취미 생활도 즐길 줄 모르는 듯하다. 이젠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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