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돌만 남부지사장.후포역사연구회장

[울진칼럼]내가 이번칼럼으로 주천대를 택한 이유는 울진에 전통 술이 있는가? 주천대에서 임유후는 도대체 무슨 술을 마시고 무엇을 하였는가? 그것이 알고 싶어서 였다. 그러나 술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된 바는 없지만 1592~1595년에 평해에 유배 온 이산해의 아계유고에서 월송정 근처에 죽피정을 손수 짓고 “이웃노인들과 함께 보리술을 마시며 축하 하였다”고 한다. 아계가 떠난 지 30여년이 지난 후에 울진 땅에 온 은둔자 임유후도 이러한 술을 마시고 취하고 슬퍼하고 즐거워 했을 것이다. 지금 주천대의 행곡마을에는 특별하게 전하는 술은 없지만 칼칼한 농주가 이 마을의 전통술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마을엔 주천대는 있지만 농주는 사라지고 없다. 술이란 참 묘하다. 하나의 술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울진의 은둔자 임유후는 조선중종때의 한양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2년이 되던 해에 동생 지후가 인조반정에 연류되어 그 사건으로 인해 임지후는 물론 숙부인 임취정과 그 두 아들이 모두 죽었다. 임유후도 27세 젊은 나이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근남면 행곡리 주천대 옆에 은거하게 되었다. 임유후는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땅으로 울진을 은거지로 선택한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은거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 아 누가 알까나?.....은거의 자취를... 대 위에 솔이 있고 솔 위에 달이 있고 달 아래 강이 있으니 매일 달밤이면 술을 가지고와 마시고 무었을 체득하였는가? 생각나는대로 술을 부어 마시면 가슴이 탁틔어 홀연한 가운데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다. 이 어찌 사사로이 번거로움에 매인자가 할 수 있겠는가? 임유후는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까지 통한의 20년 세월을 주천대에서 숨어서 살았다. 그는 죄인이나 다름 없지만 구미 마을 사람들에게 항상 환대를 받았다. 그가 남긴 「주천대기」에 보면 “고을 어른들이 내가 여기에 온 것을 즐거워 하면서 대 위에 술과 음료를 벌여놓고 서로 나를 부르면서 마시니 나 또한 산건을 쓰고 들옷을 입고 우연히 술이 취하도록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당시에 그가 고을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곳은 수천대(水泉臺)였다. 불영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천년 흐르면서 바위산을 깎아 먹어서 산이 잘린 것이다. 그런데 임유후는 수천대에서 술을 마쉬면서 “수천대는 주천대가 와전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임유후는 수천대가 주천대로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내가 험한 길 타향살이를 하면서 매양 이 대에 올라 흐뭇하게 즐겼다 날이 다하도록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잊었는데 하물며 지금 술이 샘처럼 있음에랴, 내 청컨대 산을 이름하여 작은 고산이라 하고 대를 주천대로 부르고저 하니 여러동네 어른들에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 물었더니 모두가 좋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수천대가 주천대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당시 임유후가 본 주천대의 풍경은 “세 그루의 큰 소나무가 우뚝 버티고 서 있는데 뱀처럼 꿈틀거리는 붉은 줄기와 푸른 잎이 절벽아래 소에 비치었다”고 했다. 400년이 지난 오늘 그 모습이 흡사하다. 주천대는 계곡 하천 쪽으로 꼬리처럼 튀어나와 물길을 휘어잡아 놓았다. 계곡 건너편의 바위산을 일부러 깎고 다듬어 놓은 듯해서 아담하고 수려하다. 임유후는 주천대에서 20여년동안 살다가 1653년에 조정대신들로 부터 “문장이 뛰어나고 행실이 지극히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서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병조참판, 경기감사, 호조참판 등의 직책을 두루 지냈고 73세에 경주부윤으로 근무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울진 주천대에서 임유후의 명성이 아직도 높은 것은 그가 술 마시며 글을 짓고 멋 드러진 풍류를 남겨서가 아니라 후진을 양성하고 그 후진들 중에 잘된 사람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가 있어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 학문의 씨알이 심어졌고 그 씨알이 꽃을 피웠다. 죽은 뒤에 그의 공덕을 잊지 못한 후학들이 그가 살던 곳에 고산사를 지어 기리다가 고산서원을 짓게 되고 1715년에는 그 서원이 임금님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고산서원은 1868년 대원군 때에 철폐되었는데, 1914년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강당을 세웠고 그곳에서 해마다 4월 초에 그를 기리는 모임을 갖는다. 현재 강당은 구미동의 마을 안에 있는데, 고산서원의 현판이 옛 위용을 말해주듯이 무겁게 걸려 있다. 옛 고산서원의 글씨가 남아 있어 그것을 새로 만들어 걸어 놓았다. 이 대 옆에 김시습, 오도일, 임유후의 삼선생추념비가 있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