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역사와 문화 ...제2편

 

이규상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18년, 지역사연구회장, 시인, 수필가)

 

육지에서 울릉도로 가고 오던 연락선은 오직 죽변항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1)어릴 적 높은 산에 오르면 울릉도가 보인다고 소리쳤던 시절이 회상되며 2)집안 일가가 19세기 이주해 살던 울릉도는 3)육지와 최단거리라고 알려주던 조부님이 4)일제 강점기 삼촌들과 울릉도로 돈벌이 다녔고 5)만주 하얼빈에 있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조부님이 데리고 갈 때, 죽변항에서 출발 원산을 거쳐 청진항에 내렸었고

6)당 백부는 일본인 여자를 데리고 올 때 이 길을 택했고 7)내가 아는 대표적 적산 집(일본집)은 옛 백암온천장과 죽변항에 있었는데 8)40여년 전 문화공보실 근무 당시 내가 안내했던 KBS 3.1절 특집 드라마 <횃불>을 죽변 적산집 2층에서 촬영했었다.

9)유명한 울릉도 향나무는 죽변에 홍수가 나서 파도에 밀려 울릉도에 포착되어 자생하여 명물이 된 것이라고 조부님이 알려 주었으며 10)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죽변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향나무가 두 곳이나 있어 무언의 증인처럼 꼿꼿이 살아있다.
조부님과 삼촌이 울릉도로 돈벌이 다닐 때, 베어 온 향으로 요사이도 제사에 사용하고 있다.

11)울릉도와는 죽변 쪽 사람들과 혼사가 성행했었고, 문화와 풍습이 유사한 점이 많아서 지금도 곧잘 혼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12)경주 태생 박경동 울진 부군수는 울진 땅에서 고통의 사직을 하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원래 경주인이었는데 증조부가 울릉도를 들어가서 양조장을 운영할 때, 조부를 따라 울릉도를 갈라치면 언제나 경주에서 죽변까지 와서 배를 타고 울릉도를 다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유일한 연락선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중학교 1학년 때 조부를 따라 울릉도를 가려고 죽변에 도착하니 비가 계속되어 여러 날을 묵게 되었는데, 조부가 유행하던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유명을 달리하는 역사적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만 했던 울진이, 당신에게는 통한의 울진 땅이 될 줄 몰랐다면서 눈시울을 적시었던 사연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13)흘러간 옛 노래에서도 연락선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1936년 가수로 데뷔한 백년설(본명 이창민)은 일제 최고의 인기가수로서,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마도로스 수기, 고향길 부모길, 고향소식 등 수십 곡을 히트치면서 명성을 날렸는데, 여기서 <고향소식>은 다름 아닌 죽변과 울릉도 사람을 노래한 유행가였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고향소식> 1.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사람아 인사는 없다마는 말 물어보자 울릉도 동백꽃이 피어있더냐 정든 내 울타리에 정든 내 울타리에 새가 울더냐

2.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사람아 초면에 염체 없이 다시 묻는다. 울릉도 집집마다 기가 섰더냐. 정든 내 사람들은 정든 내 사람들은 태평하더냐

3.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사람아 어느 때에 울릉도로 배를 부리고 이렇다 할 젊은 사람 나라일 많은 환고향 못한다고 환고향 못한다고 전하여 다오
그런가 하면 1941년 경 남인수의 노래 <포구의 인사>도 울릉도를 들어가기 위해 죽변을 떠난다는 가사임을 유념해야 한다.

<포구의 인사> 1. 포구의 인사란 우는 게 인사려나 죽변항 떠나가는 @팔십리 물결에... 3. 배 옆을 흘러가는 열사흘 달빛 속에 황소를 싣고 가는 울릉도 아득하다....

이 노래들은 악극단 전국 순회로 울진공연을 마치고 울릉도 공연을 하라는 의무에 따른 일정으로 죽변에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며, 작곡 작사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덧말이 필요없이 죽변항에서 국내 유일한 울릉도 행 연락선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하겠다. 울진사람은 이 두 노래를 리바이벌 유행시켜 관광자원화 시켜야겠다. (계속)

          # 본 칼럼 관련 논문은 본인의 문집 <떠오르는 태양은 빛난다.>에 게제 되어있음.
          # @의 팔십리는 죽변 - 울릉도 간 130km로 약 80해리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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