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8)


모차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책에서 거리에서 하다못해 초콜릿에도 그의 얼굴이 박혀있다. 찰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빈, 프라하 같은 도시의 관광청들은 세계적인 작곡가를 칭송하며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음악가 모차르트를 낳은 축제의 도시답게 찰스부르크는 아름답다. 이 도시에는 모차르트광장, 레지텐츠, 대성당, 축제극장, 호엔찰츠부르크성, 게트라인데 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주황색 지붕과 상가들이 즐비하다.

1997년 유네스코가 구시가지 전체와 미라벨 궁전과 정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했을 정도로 전통문화가 넘치는 도시이다.
 
찰스부르크 시가 속에 폭이 좁은 잘차흐 강물위로 보트 다섯 대가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 주황색 지붕과 마을 중앙에 우뚝 서있는 성당, 멀리 푸른 녹지가 어우러져 사진 촬영지로도 손색이 없다. 전형적인 유럽풍이었다. 조화로움에 감탄하면서 몇 카트의 사진을 찍었다.

다리를 건너 광장에는 분홍색 집이 있는데, 그곳이 모차르트가 살던 집이다. 전쟁 중에 피해를 입어 모차르테움 재단에 의해 증개축 되었다고 한다. 실내악 콘서트를 듣고는 좁은 골목길로 뻗어있는 게트라이데 거리를 걸었다. 

주변에는 상점마다 독특하게 만들어 놓은 철제 간판이 아담하여 인상적이었다. 구두 그림은 구둣가게, 빵 그림은 빵 가게라는 표시가 옛스러움을 풍겼다. 건물 정면의 모차르트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1756년 1월 27일 모차르트가 태어난 생가로 17살 때까지 살았던 3층 건물의 2, 3층은 박물관이었다. 1층 가게에는 모차르트 초콜릿, 빵, 과자류를 판매하고 있었다. 과자를 몇 봉지 샀는데 가격은 우리나라 제품보다 저렴했다. 

모차르트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천재라던가. 그의 삶을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오기 전부터 마음먹었던 일이기도 했다. 복도 입구에 중년 여성이 앉아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입장료는 10유로. 한국 돈으로는 14,000원이다. 실내로 들어서자 대 여섯 명이 관람 중이었고 잔잔한 피아노 협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여행에 지친 나그네의 피로가 음률에 녹아 내렸다. 쉬고 있는 바이올린에서 작곡과 연주로 행복했던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봤다. 편지에서 아들을 위대한 음악가를 만들기 위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보았다. 자필악보에서 육백 여곡을 그리며, 번뜩이는 천재적인 영감과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돈의 노예가 되어야 했던 생활상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남긴 흔적은 음악인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한 생애의 면모를 발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레지덴츠 내부의 모차르트가 연주했던 홀과 통치자들이 거주했던 방이 화려하여 눈길을 끌었다. 대성당에는 모차르트가 유아시절에 세례를 받았던 성수함도, 그가 연주했던 파이프 오르겐도 그대로였다. 그는 다섯 살 때 아름다운 춤곡을 혼자서 작곡했고 첫 교향곡을 여덟 살에 작곡했다.

생전에 작곡한 교향곡이 40여개라,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악기소리를 동시에 떠올린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 아닐 수 없다. 한 작곡가가 일생동안 많아야 교향곡 열곡 정도도 작곡하기도 어렵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서른다섯 해의 짧은 생애 동안 불가사의한 창조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 음악이 쉽게 만들어 진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 누구도 나만큼  작곡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작곡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연구하지 않은 음악의 거장은 아무도 없다.”

그가 남긴 편린들을 통해 천재 음악가의 삶을 둘러보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즐거운 일이었다. 음악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빛을 진 그는 변두리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런 면에서 짧은 생애를 살다간 그가 과연 행복했을까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터이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있는 것이며, 낡은 것은 떨어지고 새것이 태어난다. 늙지 않아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별과 새로운 만남이 불변의 진리로 작용하는 한 세상은 새롭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모차르트가 묻혀 있을지도 모를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을 가이드로부터 듣고 아내와 일행 2명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우리는 개성 있는 간판을 쳐다보며 갔다. 골목길로 접어들자 찾기가 어려워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물어 주택가에 이어진 묘지에 도착했다. 수백기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는 우리네와는 다르게 길지 않고 간단했다. 모차르트의 묘는 없었다. 

비엔나 시당국은 공동묘지에 묻힌 모차르트 유해를 수소문 하였으나, 찾지 못하여 흩어져 있는 다섯 곳의 묘지를 한데모아 중앙묘지를 조성했다고 한다.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유명한 음악가들의 묘소를 이장했고, 모자르트의 기념비는 중앙에 세워져 중심을 잡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주검은 장례식이 치러진 슈테판 성당에서 3마일 떨어진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로 옮겨져 면 자루에 담긴 채 다른 주검들과 함께 매장되었다. 매장방식은 장례절차 간소화로 그 시대로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묻힌 정확한 자리는 알 수 없다.

황제 요제프 2세는 전통 장례의식의 불필요한 낭비를 싫어해서 자신의 재위기간에 영구차 뒤 따르는 문상 행렬을 없애고, 자루 매장 방식도 규범화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초라한 장례식에 대한 사회 무관심을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완성 ‘레퀴엠’이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된 것인가. ‘레퀴엠’ 이란 문장 전체를 번역하면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다. 그는 죽기 6개월 전부터 자기를 시기하는 누군가가 자기를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술가들에게 흔히 있는 중증의 우울증이리라.

이즈음 음악가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이 세상을 떠난 아내를 추도하기 위해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을 의뢰했다. 재산이 몰락되고 두통과 전신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에게 슬픈 곡이 맡겨졌으니. 이 곡이 자신을 위한 진혼곡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발이 붓고 토하기 시작하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병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에서 연주될 음을 제자에게 지시해 주면서 숨을 거두었다. 1791년이니 서른다섯 살의 나이였다.

모차르트 음악은 부드럽고 순수하다던가. 공원이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와 귀에 익은 음악이 더러 있다. 친근한 일상어로 지극한 삶을 상징하는 시처럼 아름다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 간다. 기쁨과 슬픔, 설렘과 외로움 그리고 고통까지도 그의 손을 거치면 언제나 순도 높은 아름다운 음률이 된 것인가. 

장중한 진혼곡을 듣는다. 감미로운 음악소리에 취해 별 조차 다 떨어진 캄캄한 밤이다. 레퀴엠 한 조각이 집어 삼킬 듯 밤새 내 가련한 영혼을 살찌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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