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문화와 역사 .... 제3편


울릉도 연락선은 국내 유일하게 죽변곶竹邊串(곶은 천연요새 항구임)에서만 다녔다는 사실을 확인했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울진군지 등에서 찾아본다.

1) 울릉도 주민을 철수시켰다가 다시 이주시켜 살게 했다는 기록이 여러 번 있지만, 최근 1883년 이주 때는 우리 집안사람도 이주해갔고, 박경동 전 부군수의 증조부도 이때에 양조장 사업차 들어갔다고 했다.

2) 고구려 시대부터 울진에 속해있던 우산도于山島 또는 우릉도于陵島는 우진야군于珍也郡(울진군)의 우于는 같은 글자로, 울진에 소속된 고장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삼국유사가 울진대국 장천굴(성류굴)에 원효대사와 보질도 태자가 수도하였다고 기록할 때, 울진대국에는 우진야현과 우산현이 있었다고 보아지며, 그 뒤에 대현인 울진현 속에 소현인 울릉도(해곡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울릉도를 제주도와 같이 섬島를 사용하면서, 1900년에 울릉을 공식적으로 강원도 울진군 에 편입시키고, 1906년에 경상남도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경상북도로 재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언제나 죽변과 가까운 역사적 이웃이었다.

3) 구 울진군지에는 울릉도를 우산도于山島 또는 울릉도鬱陵島 또는 무릉武陵라고도 불렀으며, 울진군의 속현이라고 되어있다.

4) 삼국사기에 지증왕6년(505년) 2월에 주군현州郡縣제도를 시행하면서, 실직주(삼척 울진 영해 청하까지)에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삼았다고 되어있고, 13년(512년) 6월에 우산국이 歸服來屬(귀복내속)하여 해마다 토의土宜(토산물)를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洲(강릉)의 @정동(正東)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하거니와 지방이 백리로 험함을 믿고 귀복치 아니하였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何瑟羅州(강릉)의 군주가 되어 생각하되, 우산인于山人은 어리석고도 사나와 위세로서 내복來服케 하기는 어려우나 계교를 써서 항복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목조사자木造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해안에 다다라 거짓말로 고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맹수를 놓아 죽이겠다고 하매 그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 라고 기록 되어있다. 김 이사부는 군주로서 실직주에 맨 처음 임명되었지만, 울릉도를 정벌 할 때는 강릉 하슬라주(강릉 삼척 울진 영덕 청하까지) 군주가 되어서 복귀시켰다는 기록인 것이다.  

또 울진군은 본시 고구려의 우진야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울진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인데, 영현領縣이 하나 있었다. 그 영현은 해곡현海曲縣(곡曲 또는 서西로도 되어있음)으로서, 본시 고구려의 파단현波旦縣 이라고 유추된다. 

또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6 고구려·백제편의 고구려 하슬라주 편에는 30개의 군 현 곡 홀이 있는데, 군은 7개, 현은 21개, 곡과 홀은 각 1개씩이다. 하슬라 주에는 지금의 영덕 청하까지 포함되어 울진군과 실직군도 속해 있었다. 이때 실직군(삼척)은 실직주에서 군으로 강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계속)

@ 정동(正東)이란- 울릉도가 울진의 정 동쪽에 있음을 말한다. 이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울릉도가 하슬라주의 정동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울진이 하슬라주에 소속돼 있으므로 울릉도는 울진(죽변곶)의 정동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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