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태 바르게살기중앙회 부회장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13년째지만, 아직 내 마음속에 살아계신다.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중풍이 와서 6년간의 투병생활 동안 최선을 다해 간호했지만, 82세 되던 2002년 8월에 생을 마감하셨다.

인생의 살아가는 굽이굽이 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다. 아버지께서는 할배한테 매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엄청난 부자셨지만, 머리를 늘 빨랫비누로 감는 등 평생 검소와 절제가 몸에 익은 분이셨다.

누나들 넷 이후 나를 막내 외아들로 두었지만, 아침 일찍 기상하도록 하고 생활의 낭비를 하지 않도록 늘 가르쳐 주셨고, 비교적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성품으로 성실한 생활 자세가 몸에 배도록 가르쳐 주셨다. 지금도 그런 생활습관 때문에 새벽이면 기상을 한다. 

아버지께서는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지 않을 때, 지역민들이 선출하는 가장 고위직인 농협중앙회 봉화군 농협조합장을 20년 가까이 하셨다. 지금도 봉화군 관내에 다닐 때, 연로하신 주민들께서는 아버지를 기억하고 내게 좋으신 말씀을 해 주시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온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농협중앙회 군 농협에 근무를 하셔서 많은 농토가 있음에도 농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들의 잘된 과수원 경영 모습을 보면 사과 과수원을 만들고 싶었던지, 동네 1,500여 평 남짓 되는 텃밭에 봉화군조합장 퇴임 무렵 사과나무를 심으셨다. 아버지의 부지런함으로 자그마한 과수원이 화분처럼 가꾸어졌다.

그 무렵 나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으나, 애초부터 남의 밑에 들어가 월급쟁이는 하기 싫었던 터라 자연 과수원 일에 하나씩 물들어 갔다. 그래서 농업경영인(농민후계자)이 되었고, 집에 있는 농토와 야산을 일구어 과수원도 세 곳으로 늘어나 대형화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전두환 정권초기 농협개혁의 미명하에 군 농협제도를 없앨 때, 마지막으로 봉화군 농협조합장을 그만 두셨고, 늘 나와 같이 과수원 일에 몰두하셨다. 그 시절 난 참 열심히 과수원 일을 했었고, 그때 ‘노동의 신성함’과 ‘일과 함께 산다는 보람이 이런 거로구나’ 하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사과 추수 끝 무렵이면 항상 초겨울이다. 추운 겨울이면, 사과나무 가지치기(전정)을 해야 했고, 항상 아버지와 둘이서 겨울 내내 사과나무 전정을 했다. 전정을 할 때 주로 아버지께서는 전정자국에 톱신페스트(부란병방지약)를 일일이 바르셨다.

아버지는 사과추수 때와 색깔이 나지 않은 이삭을 딸 때, 사과를 떨어뜨릴까봐 장갑을 끼지 않았다. 아버지 손길이 내 손에 스칠 때, 차가운 날씨 탓인지 아버지 손이 나보다 유난히 싸늘했다. “아부지요, 손이 많이 차갑니더.” 하며, 몇 번씩 아버지 손을 감싸드리던 생각이 난다.

또 틈이 날 때 마다 지역사회에 관심을 두어 JC활동도 하면서 JC이념에 심취하여 한국JC 중앙회장까지 갈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서울 길거리와 시골장날 난전 과일장수의 사과를 볼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과수원시절 일하던 생각 때문에 한참 서서 사과를 유심히 보곤 한다. 그리고 자주 봉지사과를 산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그때마다 차갑던 아버지 손길이 아직 그대로 느껴지는 듯해서 콧등이 찡 할 때가 있다.

이제 지금 겨울이면 내손이 예전과 달리 차가와지는 것을 느낀다. 나이가 드는 탓일까? 세상은 다 이렇게 살다가겠지. 또 아버지의 차갑던 손이 생각난다.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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