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역사와 문화... (4) 이규상


 이규상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18년, 지역사연구회장, 시인, 수필가)
1) 삼국유사 권1 지철로왕 편에는 하슬라주(강릉 삼척 울진 영덕 청하까지)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가 있다. 이 섬 둘레가 이만육천칠백삼십 보이다 (중략).

여기서도 이사부가 울릉을 정복한 삼국사기와 똑같은 내용으로 이찬 박이종이 목조사자로 항복받았다는 기록이 되어있다. 이찬 박이종이 이찬 이사부와 동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 내용은 지면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울릉도는 고을 (울진현을 말함) 에서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정동正東이라 했는 데,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정동은 북위가 비슷한 죽변곶 밖에는 없다고 본다. 곶은 천연요새 항구를 말하는 것으로 동해의 간절곳, 장기곶, 호미곶, 죽변곶 등이 있을 뿐이다.

2) 울릉도가 울진군에 속해 있었다는 기록을 울릉군에서도 찾아냈다. 울릉군 연혁의 역사란 중에 이렇게 적혀있음을 발견했다.  <512년 (지증왕 13년) 하슬라 군주인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면서(중략), 후삼국 통일이후 울진 현에 소속되었다.> 라고 되어있음은 이사부가 울진 땅(죽변 곶)에서 출항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고구려와 신라이후는 줄곧 울진에 속했다는 확실한 기록인 것이다.

또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 현에 소속되어(중략) 1906년-1914년 경상남도에 편입되었다가 1915년 경상북도에 편입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울릉도가 1905년까지 울진과 역사적 궤를 같이 한 울진에 속해있던 땅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확고한 대목이다.

이사부 출항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출항했다고 보면, 울릉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북위 37도가 울진이며, 가장 가까운 항구는 130km의 죽변곶이다. 동해 162km 후포 159km 부산해운대 295km이다. 

3) 동국여지승람 제45권에는 <울진현은 원래 고구려의 우진야于珍也 현이다. 고우이군이라고도 한다.> 울릉군은 별도로 독립해서 지면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울진현의 산천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산도于山島 ; 울릉도鬱陵島 ;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울진을 말함) 바로 동쪽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 데 (중략), 삼국사기와 같이 여기서도 이사부가 나무사자를 만들어 항복을 받아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요한 발견은 섬이 고을(울진을 말함) 바로 동쪽바다 가운데 있다는 표기이다. 울릉도 정벌 출항지는 죽변곶이 당연시 되는 대목이라 본다. 우산도(울릉군)는 울진 현에 속해있는 섬이라고 했다. 앞 2)와 같이 울진현 속의 울릉도이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울진현 산천편에는 죽변곶과 골장진骨長津과 수산강守山江(왕피천)이 기록되어있고, 이 수산강 하류에 울진 전천前川(남대천)과 합류하는 유역을 울진포蔚珍浦라고 하고 포영浦營에는 해군 지휘관 격의 만호 1명을 배치했다고 적혀있다. 

4) 신라 법흥왕 7년 정월 율령을 반포하고, 11년(524년) 갑진년 정월에 울진봉평 신라비를 건립하게 된 것은 신라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고구려의 유목민 또는 난민이나 우산국(울릉군) 사람들에게, 말을 잘 듣고 조공 등을 확실히 납부케 하기 위한 위엄과 경각심을 심어 주기위하여 울릉도로 가는 유일한 항구인 죽변곶에 비석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비석에 파단현波旦縣(고구려의 울진 속현) 이라는 글자는 해 뜨는 파도의 아침이라는 뜻으로 울릉도를 지칭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사부가 울릉도 정벌 시 출항한 항구는 다름 아닌 죽변곶이라고 확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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