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대구 정토사 주지 수성(守性) 스님


“혼자서 불경 45,369장 리모델링 기적, 1일 평균 10시간 9,000일,

25년간 작업량...  팔만대장경의 1/4, 컴퓨터로 CD화 작업... 축쇄판 13권도 출간”



▲정리된 자료를 모두CD 4장에 담아 法 輪 常 轉 이란 이름으로 제작 - 그동안 정리한 대장경을(일대시교) 13책으로 축소 출판하였고, 이 자료를 모두 CD 4장에 각각 나누어 담아 법륜상전(法 輪 常 轉)이란 장 순서를 정하고 각장에 편자의 일대사진을 표지얼굴에 세대 별로 담았다.
.울진은 현대사 불교의 산실이다. 특별히 사찰 수가 많아졌고, 불교 신자수가 증가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 불교계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뜻에서 이르는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조계종과 천태종의 종정에서부터 종단 서열 2~4위를 울진사람들이 차지했거나,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천태종단에는 현 종정 도용스님이 울진 후포 출신이며, 그 밑에 총무원장, 감사원장, 금강대학이사장 등을 울진출신 스님이 역임했거나 하고 있어, 혹자는 천태종을 울진종단이라 부를 정도이다.

뿐만아니라, 이제는 조계종단의 원로로서 봉직에서는 물러났지만, 불교계에서 고명하신 서면 출신의 방지하 스님도 배출했다. 그 분은 조계종단 종회의장까지 지냈다. 울진이 역사적으로 아니면, 자연·지리적으로 불교와 인연이 많아서일까!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울진 출신으로서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만한 수도승이 발굴됐다. 그는 34년간 오로지 불교경전 복구에 매달린 분이다. 그는 34년간 이 일에 매진하여 닳고 닳아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은 고불경 45,369장을 판독, 전산화 했다.

1일 평균 5장을 입력시킨다면, 1일 10시간을 투입하여 25년간 작업량이다. 이는 일이나 작업이 아니라, 수도자적 고고한 성스러운 행위이다. 이에 대해 수성스님은 “우리 후학스님들 깨끗한 교재로 공부해서 어서 성불하세요” “내게 있어 이 일은 수행이고 기도이며 사경입니다.”

“때때로 피곤하고 지칠 때면 그 옛날 경판을 만들고 이를 찍어서 부처님의 말씀을 보급했던 스님들을 생각합니다. 게으름을 떨 시간이 없습니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니까요.” 라고 말씀하신다.   

 ▲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나와는 독특한 인연으로 이어져 왔고, 이렇게 면면히 끊임없이 이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강원 (해인 승가대학) 학인시절 초급부터 졸업할 때까지 장경각(藏經閣)내 법보전(法寶殿)을 매일 4차례 드나들며, 새벽 3시부터 한 차례 두 시간씨, 하루에 네 차례, 4부로 8시간씩 기도를 도맡아  해 왔기에, 잊으랴! 잊혀지지 않는 인연이었다.

기도시간 때 마다 드나들며 경판을 보면서 때로는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이 많은 경전을 언제 다 읽고, 한번 써 보나 하고, 개인적인 염원을 하기도, 했었던 것이, 그 실현의 시간이 주어지기에 처음에는 붓글씨로 쓰려고, 2~3년 시도하다가 마침 컴퓨터가 나오는 바람에, 컴퓨터로 지금까지 그 전체의 1/4을 겨우 쓰고 정리하다 보니, 이제는 그 시간과 체력마저  다 소진돼, 한계가 오고 말았네요, 눈물만 나네요...

“이 일을 다음 생에 좋은 인연되어 다시 와서 쓰게  될까요?” 하면서 그 염원을 담아 오늘도 그 내부 사진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 하면서 서원을 세워 발원을 한다.


★ 출생과 입산 .... 수성스님은 조계종 방지하 스님과 삼근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39년 가난한 농가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속세명은 조전세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 6.25 전쟁이 나, 서면 방촌마을 사성봉 할아버지로부터 3년간 한문을 배운 뒤, 당시 영림서 직원이던 맏형을 따라 강원도 삼척의 원덕중을 나왔다.  

1958년 18세의 나이에 공부를 더 하려고, 불영사에 들어간 것이 불교와의 인연이었다. 집에서 짊어지고 간 책으로 공부를 하는데, 노스님께서 하시는 말, “그 까짓 것 배우려고...”라는 질문이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 컴퓨터 이용 경전 복원하는 수성 스님
... 포교당을 찾는 신도들은 의아해 했다. 세속 나이로 연로한 스님이 새벽예불이나 법회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늘 무엇인가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께서 이제까지의 성과물을 책으로 펴내도 되겠다는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컴퓨터와 씨름했던 것이 닳고 닳은 옛 경서들을 깨끗하게 복원하려 했던 스님의 깊은 뜻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강원 교재
... 대구 정토사 수성(守性) 스님. 도시 한 복판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는 스님은 목판으로 인쇄된 한문 경전들을 컴퓨터를 이용해 옛 형태를 재현한 한문 교본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직까지 전통강원 학인 스님들이 공부하는 교본들이 그 옛날 목판본에서 찍어낸 것들이고, 오랜 세월로 인해 글씨가 심하게 마모되고 흐려서 읽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점을 감안하면 참으로 뜻 깊은 작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60년대 초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를 할 때였습니다. 경전의 의미를 새기기에 앞서 먼저 어떻게 생긴 글자인가를 확인해야 할 정도로 책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붓글씨로 깨끗이 써서 후학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년 배워 ‘컴퓨터 박사’ 돼
... 지난 58년 불영사에 주석하던 혜진(慧眞)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이후 해인사 자운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뜻하지 않게 해인사 총무, 조계사 총무 등 수십년의 생활을 사찰행정에 종사해야 했다.

그리고 지난 80년대 말, 마침내 모든 소임을 떨쳐 버리고 대구에 정착한 스님은 포교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그리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 스님은 40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배움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1년을 부지런히 배웠다.

그러는 동안 웬만한 프로그램은 스스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돼 있었고, 실제 사찰신도관리 프로그램을 제작해 가까운 도반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스님들과 신도들 사이에서는 ‘컴퓨터 박사’로 통한다.
 

- 대구淨土寺 附設藏經出判 三藏園에서 수성스님
053) 761-8676, E-mail : tkawkd99@hanmail.net


★한문경전 보존의 중요성
... 컴퓨터를 배운 뒤, 바로 고경전 복원작업에 착수했다. 분별 가능한 글자들을 입력하는 동시에 육안으로 알 수 없는 글자들은 다른 판본들과 비교하며 일일이 컴퓨터에 입력시켜 나갔다. 또 없는 글자들은 비슷한 글자들을 조합해서 대치시켰다.

오늘날 한글 대장경도 나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한문경전을 이용해 다시 번역해야죠. 그 때를 위해서라도 한문 경전을 보존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겠어요?

까다로운 경전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작업해도 하루에 5∼10장 분량을 입력하기 어려웠고, 비교적 수월한 경전이라고 해도 30∼40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어서 인지 갈수록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써야만 했다.

이런 온갖 노력 끝에 스님은 지금까지 통도사 소장본 능엄경 312장, 금강경 246장, 쌍계사 소장판 기신론(원효-현수소 등) 552장, 원각경(규봉소-함허해) 781장, 화엄경 6,206장, 법화경 720장, 경덕전등록 802장, 선문염송 1,015장, 대반열반경 1,030장, 종경록 2,093장 등 지금까지 총 1만4,000 여 장 분량을 컴퓨터에 입력시켰으며, 중간 중간 이들 성과물을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성총 스님의 현신” 상찬도...특히 동국역경원장 월운 스님은 수성 스님의 작업에 대해 조선 현종 때(1672) 목판본을 간행해 강원 교육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던 성총 스님의 불사에 버금가는 일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도의 지식과 기술보다는 부단한 성실성을 요구하는 경전 복원작업. 스님은 어쩌면 천년을 이어갈 거룩한 경전 불사를 위해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을 불사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성진 영남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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