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의 역사와 문화...제6편 이규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옛길하면 십이령 고갯길을 생각하게 되지만, 조선시대 전국 세 번째대로였던 평해 3대로가 동해안을 뚫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식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평해3대로는 7번국도의 전신이다.
조선조 도로는 노폭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로 구분 사용하였다.
도로시설은 관리들을 위해 관, 역, 원이 발달했는데 41역도驛道에 524속역屬驛으로 전국적 교통체계를 갖추고 역도를 관장하는 종6품 찰방察訪을 두었다.

찰방역을 중심으로 속역을 두고 역도 권내의 도로는 물론 역과 원을 관리케 했다.
조선의 박제가 정약용 이종환등이 찰방 직을 역임한 사람들이다.
역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왕명의 전달과 공문서나 물자운송을 담당하며, 사신의 왕래에 따른 접대는 물론 숙박의 편의와 범죄인의 검문검색으로 활용되었다.

원院은 역과 달리 일반상인이나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해 설치된 시설로 문물과 상업의 민간교통발달에 큰 역할을 해냈던 곳이다.

평해3대로 중 울진군내의 역驛은 부구에서 평해 역까지 흥부역興富驛 수산역守山驛 덕신역德神驛 달효역達孝驛이 있었고, 원院은 가을원加乙院 두천원斗川院 소조원召造院 광비원廣庇院 망양원望洋院 다시원多施院 평등원平等院이 있었다.

원칙으로 역은 30리마다 원은 10리마다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에 상업의 발달로 쇠퇴되거나 혁파되었고, 그 기능은 여점旅店이나, 주막酒幕과 객주客主로 옮겨갔다.
대표적인 곳으로 장호원, 조치원, 사리원, 이태원등 남아있다.

지금은 발달된 교통수단으로 자동차 선박 기차 비행기나, 편지와 전화 팩스 메일로 문명의 통신수단을 이용하지만, 옛적엔 말이나 당나귀 노새 버새 소에 의존하거나 가마나 짐꾼을 이용했었고, 긴급할 때는 봉수대에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밝히는 것으로 봉화를 올렸다.

봉화는 외적의 침입이나 난이 발생하였을 때 횃불로 위급상황을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었다.
봉화를 올리는 울진의 봉수대는 향출도산봉수(나곡) 죽변곶봉수(죽변3리) 죽진산봉수(진복) 전반인산봉수(망양) 사동산봉수(사동) 표산봉수(구산) 후리산봉수(후포) 등 7곳이나 설치되어 있었다.

형태가 좋은 봉수대는 내가 공무원재직 시에 보수 단장한 두 곳이 있는데, 이제는 관광자원화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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