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13

서울에서 고향인 울진으로 내려 갈 때면 나는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서울에서 울진까지는 4시간 남짓 소요된다. 대관령을 넘어 해안선을 따라 한참 달리다. 울진에 들어서면 고운 자태의 백일홍이 반겨준다. 배롱나무라고도 부르는 백일홍을 보면 방금 튀겨낸 팝콘 같기도 하다.

길 위에서 오랜 지루함은 백일홍을 보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린다. 울진의 상징인 백일홍은 경상북도의 꽃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 쪽에는 꽃길이 이어지고, 다른 한 쪽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펼쳐진다.

나는 서울살이를 하며 정원수로 심겨진 백일홍이 그다지 아름답다고 여기진 않았다. 피다 만 듯한 느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화사함이 반감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고향에 있는 백일홍의 선명함이 각인되어 버린 탓일 수도 있다.

봄에 피는 다른 꽃들도 많지만, 여름철 백일홍은 작은 꽃들이 푸른 잎 사이로 올망졸망 피어 있어 더 앙증스럽다. 게다가 우아한 꽃봉오리는 깨끗함을 상징하는 선비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 연유일지 모르지만, 나는 수다한 꽃 중에서도 유독 백일홍을 좋아한다.

유년시절 우리 집 문 앞에는 키가 나지막한 백일홍 한 그루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뒤뜰에 심어놓은 것을 아버지가 마당으로 옮겨 심어 우리 집의 화초가 되었다. 백일홍은 마치 단짝 친구처럼 등굣길에 배웅을 하고, 하굣길에도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마루에서 바라본 목 백일홍은 그 붉은빛으로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나의 아버지는 약주를 즐겨 하였다. 술에 취하여 들어오시는 날이면 밤이 새도록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술만 아니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텐데, 그게 문제다” 하시던 할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무렵 집안 어른들은 할아버지 묘를 이장하였다. 바닷가 마을에 뿌리내린 무속신앙은 집안 어른들 의식 속에도 박혀 있었다. 무당을 불러와 살풀이를 하면 좋겠다는 말에 할머니와 어머니도 수긍을 하였다. 집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묘지로 가서 닭의 피를 뿌리고 푸닥거리를 시작하였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돼지머리와 어물, 떡과 과일로 상을 차렸다. 모든 준비는 어머니의 손이 가야만 했다. 어머니의 젖은 손은 마를 날이 없었다.

무당은 구성지게 주문을 외우더니 어릴 때 죽은 삼촌을 장가보내야 된다고 했다. 무당의 주문에 따라 죽은 자의 혼인식이 치러졌다. 언제나 마을에 징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술을 끊게 해달라고 두 손으로 간절하게 빌었지만,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은 얼마나 세었던지 무당의 푸닥거리에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아버지의 음주로 인하여 내 유년시절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아버지의 품은 늘 불안하였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우울한 마음일 때면 여름철 대문 앞에 핀 백일홍이 큰 위안을 주었다. 백일 동안 피고 지는 꽃봉오리는 어둠 속에 갇힌 내게 희망이었다.

그땐 마을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다. 길을 넓힌다고 담을 안쪽으로 들여쌓으면서 백일홍의 뿌리가 잘려 나가고 말았다. 조금 앞으로 옮겨 심었으면 될 일이었는데, 그 후부터 백일홍은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말라가더니 기어이 고사하고 말았다. 

백일홍이 사라진 후로 우리 집에 벌과 나비가 날아오지 않았다. 백일홍 탓이었을까. 가끔 고향에 내려 갈 때면 집안이 텅 빈 것 같아 허전했다. 나는 백일홍이 있던 자리에 나무를 심고 싶었다. 몇 년이 지나서 대문 앞에 두 그루의 백일홍을 심었다. 이젠 제법 자라 여름철이면 활짝 꽃을 피운다. 가끔 고향 집에 들르면 옛 친구처럼 다정하게 나를 맞이해 주고 있다.  

가슴 아픈  전설의 의미를 담아서일까. 백일홍 꽃말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그 꽃이 피는 계절이면,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꽃에 새겨져 있는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면 눈물이 왈칵 치솟는다. 유년시절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내 마음을 아버지는 모른 척 했던 것일까.

청순하면서도 화사한 백일홍이 그립다. 올해도 고향 집 문 앞 백일홍이 필 때면 아버지께 약주 한 잔을 올리고 싶다.
“아버지, 당신은 내 삶의 큰 나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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