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 16


일본에 여행했을 때 일이다. 오사카 간사이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밟을 때 나이 지긋한 분이 열심히 안내하고 있었다. 교토에서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향했다.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순간 안내원이 달려와 가방을 들어주었다. 아침 식사할 때도 주방 여성이 연신 인사하기 바쁜 모습이었다. 내가 여행을 그렇게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오사카 신사이바시 거리에서 시장을 관광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경비실 안내원에게 화장실을 물었을 때, 지하도에 있다며 따라 나와 정중히 안내해 주었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두 사람이 상가주위를 돌고 있었다. 경비원이 순찰 중인 듯했다.

한 시간 가량 상점을 드나들며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세 번이나 마주쳤다. 그들을 보고 협동과 질서를 생각했다. 오사카성을 관람하고 일행은 먼저 내려가고 혼자 걸어오다 유적지가 보여 들렀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호코쿠신사라 했다.

입구로 들어가는데 저 편에서 한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얌전하고 지적이었다. 그 여성은 내가 지나갈 때까지 다소곳이 서 있었다. 남자 앞을 먼저 지나치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신사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이 흘렀다. 사람들은 그리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에는 전통복장을 입은 남성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나올 무렵 문 앞에서 홀로 진지하게 묵념하는 그녀가 보였다. 여행 중 일본인들의 질서와 친절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일본인들의 배려와 친절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 때도 물건 사재기와 약탈이 없었다. 몇 백m씩 줄 서서 구호물자를 배급받는 일본인에게 세계가 놀랐다. 먹을 것이 부족한 마트에서 자기에게 할당된 식료품만을 사가지고 나오며 더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나 거부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상 초유의 재난에도 오히려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어 세계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몇 해 전 부산 화재로 일본인 관광객 일곱 명이 숨졌을 때도 부산을 찾은 유족들은 오히려 "미안하다"고 했다. 울부짖는 유족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의연하고 침착했다. 통곡도 폐 끼치는 것이어서 슬픔을 안으로 삭이는 것이다. 

이슬람 무장 단체 IS에 처형됐다는 일본인 유카와가 인질로 잡혔다. 일본 아베 총리는 공개적으로 "IS와 싸우는 나라들에 2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일본에선 아베의 말이 처형을 불렀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도 유카와 아버지는 “국민에게 폐 끼쳐 죄송하다. 정부 노고에 감사한다.”며 몸을 낮추었다.  

일본인은 왜 이렇게 친절한가. 초등학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폐 끼치지 말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정교육도 마찬가지라 한다. 그렇게 배운 아이들은 어른이 돼 '폐 끼치지 않기'를 실천한다. 어쩌면 폐 끼치지 않기는 단합된 힘이 되어 다른 나라를 괴롭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일본을 집단사회라 한다. 이런 집단문화는 우리나라와 주변국들을 침략하여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한반도를 유린하고,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아시아를 넘어 미국 진주만을 습격했다. 장정들이 끌려갔고 앳된 소녀들도 끌려갔다. 전투를 앞둔 칼날은 소녀들을 차례차례 욕보였다. 위로받지 못한 소녀들의 비명이 안타깝게 스러져갔다. 그릇된 야망이 대지를 흔들었다. 

일본은 진정 친절한 나라인지 묻고 싶다. 내가 여행 중에 만난 일본의 친절은 상항에 따라 다른 것인가. 지금도 일본은 참혹한 역사를 부인하고 사죄하지 않는 건 그들 위에 왕이 있어서인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지 않은 척, 침략전쟁을 하지 않은 척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생명을 다하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여전히 눈치를 살핀다. 종전기념일에는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야스쿠니신사에 달려가 전범을 추모하고 군국주의 시절을 기린다. 

지금이라도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속죄하고 이웃나라에도 '폐 끼치지 않기'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 진정으로 친절한 나라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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