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태, 바르게살기 중앙협의회 부회장


지난 6월 봉화군 봉성면 금봉리에 있는 천성사 사찰에 지장보살전 낙성식이 있어서 20년 만에 그 동네를 찾았다. 1991년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어 후계자 자금을 보태서 마련했던 꾀 큰 내 과수원이 있었던 동네이다 (그 당시는 후계자 자금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했다).

대학졸업 후 유수한 건설회사에 취직합격을 하고도 남의 밑에서 월급쟁이 하는 게 싫어서 사업을 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께서는 사업한답시고 돈만 없앨까봐 반대해서 봉화에 내려와 몇 년을 허송세월했다.

그러다가 농토 등 부동산이 많아 소일삼아 시작한 과수원 만들기가 농업에 종사한 계기가 되었다. 농민후계자(농업경영인)가 된 것은 농민단체가 지역에서 장차 큰 힘을 발휘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선배 권유로 봉화JC에도 가입하게 되었고, JC회원이 된 것이 내 인생 운명의 지침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점점 JC활동에 심취하여 전국 큰 시 단위 기라성 같은 JC출신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사)한국JC 사상 최초로 군 단위에서 중앙회장직에 오르게 되었다.

‘JC 전성시대’ 중앙회장직을 수행하느라 보통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재정을 쏟아 부었다. JC활동에 썼던 많은 재산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아마 우리 자손 몇 대가 편히 먹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 한다’는 말이 있듯이 20년은 정말 긴 세월이었다. 내가 소유했던 과수원을 못 찾을 정도로 마을이 변해 있었다. 옛집들과 동네사람 대부분이 바뀌었고, 잘 사는 동네로 탈바꿈해 마치 유럽 농촌 같았다.

사과농사에 종사 후 재배기술을 완전히 습득해 육성한 과수원이라 누가 보더라도 탐낼 수 있었던 과수원이었다. JC활동을 마칠 무렵 수확이 시작될 때 돈이 필요해 과수원을 그만 팔아 버렸다. 내 과수원을 산 사람은 농사를 잘 지어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20년 만에 과수원과 마주 했다. 숱한 기억이 떠올랐다. JC에 몰입해 돈 쓰느라 딱 한 번 수확 후 후딱 팔아버려 과수원이 나에게 얼마나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까? 한참 서 있다가 과수원을 떠나왔다.
내가 지금 타고 다니는, JC 중앙회장 때도 탔던 23년 된 포텐샤도 생각이 있다면 얼마나 묘한 감정이 솟았을까? 나와 함께 수없이 그 과수원을 갔으니까.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이미 없어진 재산에 대해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사라져간 재산에 대해 생각을 내려놓은 지 벌써 오래되었다.

남아 있다면 오직! 단 하나! 청년시절 내 인생 목표였던 ‘(사)한국JC 중앙회장’직에 올랐기 때문에 젊음의 열정을 다했던 (사)한국JC 역대 중앙회장으로서 <남은 사명감>이다. 그것은 <리더십 개발>의 <대표 청년단체> 출신답게 ‘국가발전을 위해 일해야 할 봉사의 길’이다. ‘죽을 때까지 한 길’로 가는 거다.

고대중국의 강태공은 오랜 옛날 70세 넘어서 세상에 나아가 중국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나. 청년시절 목표를 달성했던 사람으로서 남은 인생은 어차피 덤으로 사는데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삶을 찾아가는 것이 맞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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