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울진 독립운동사 재조명


                   현재 광복회 울진지회 등록회원 24명 

                   유족회에 대한 예우와 관심부족 아쉬워
  

                          일제 당시 울진읍내 전경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광복 70주년을 맞아 울진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여 울진의 기상과 정신을 다시한번 일깨우고자 한다. 울진에서는 누가 어떻게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는지, 항일 운동과 관련하여 울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살피고, 울진출신의 애국지사 77인의 명단도 함께 싣는다.
그리고 광복회 울진지회 현황과 보훈 3단체 현황도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 편집자 주

■ 광복회 울진지회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은 3대가 어렵게 삽니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가 빈민특위를 해체한 것은 잘못입니다.” “어떻게 광주사태 피해자나, 수학여행 피해자들을 독립지사 유족들 보다 우대합니까? ”
“회원 수가 적어서 그런지, 지역사회에서도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다른 보훈단체들에 비해서도 예우가 떨어집니다.” “경북도내 23개 다른 시·군에는 모두 광복회를 비롯한 각종 보훈 단체들이 들어가 활동할 수 있는 회관이 세워졌는데, 울진만 없습니다.”   

애국지사 후손으로서 광복회 울진지회 현 회장을 맞고 있는 북면 신화리의 전광순 회장과 곽동호 사무장, 강순식, 이동하, 윤영재 회원들은 열변을 토한다. 현재 보훈 3단체가 입주해 있는 ‘보훈회관’ 도 3단체에서 자체 기금을 조성하여 마련했다고 한다.

타 시·군처럼 보훈회관을 건립하여 모든 보훈 단체들이 함께 입주하면, 컴퓨터 등 각종 장비와 간사를 공동으로 쓸 수 있을 텐데, 울진군에 수차 건의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울진출신 77명의 애국지사나, 유족회원들이 사망과 전·출입으로 현재 24명으로 줄어들었는데, 이런 추세라면 얼마 못가 광복 유족회가 사라질 전망이라고. 보훈청은 예산타령을 하면서, 애국지사의 후손들이 여러 명이라도 연금을 수령하는 유족 1인만을 회원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회원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금은 수령하지 못하는 차남이나 차손이라도 유족회원으로 가입을 인정을 해 주면, 광복회의 명맥이 이어질 것이고, 이는 곧 민족정기를 발현한 애국선열들의 뜻에 부합하는 일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 울진의 항일 운동사

1894년 안동 갑오의병으로 시작하여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가 그 기간이다. 맨 앞에 의병항쟁이 나서고, 뒤를 이어 구국계몽운동, 1910년대 만주망명과 독립군 기지건설, 의열투쟁, 1919년 3‧1독립만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 1920년대 청년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1930년대 정당중심의 독립운동과 국내의 노농투쟁, 1940년대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독립전쟁과 국내의 독립군적인 결사대가 등장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은 50년 넘게 줄기차게 이어졌다.

                                    <독립유공포상자 현황>


울진 사람들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를 보자. 지금까지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인물은 모두 1만 2천명을 갓 넘는데, 그 가운데 울진 사람들은 77명이나 된다. 이 수치는 전국 시군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전기 의병 시기이던 1896년 울진유진장에 주병헌朱秉憲, 평해유진장에 장필한張弼漢이 활약하였다. 울진유진소는 죽변에 일본 어선이 출현하자, 이를 공격하여 일본인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울진출신 의병으로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전재호田在浩‧ 김용욱金容旭(金致彦)‧ 전배근全培根‧ 최경호崔慶鎬‧ 장진수張鎭洙‧ 이고포李姑浦(택호일 듯) 과 남태영南泰永‧ 박춘근朴春根‧ 백수영白琇英‧ 사문성史文成 등이다. 이 밖에 이윤명李潤命(북면)‧ 한영육韓永育(온정) 등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구국계몽운동이 울진에서 시작된 데에는 주진수朱鎭洙와 황만영黃萬英의 공로가 결정적이다. 1908년 주진수는 울진 원남에 만흥학교晩興學校를, 황만영은 기성면 사동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열어 신교육을 펼쳐나갔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신민회의 만주망명 계획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주진수요, 평해 사동의 해월헌 종택 차종손 황병일黃炳日과 이 외에 집단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직산리 경주이씨 이규동李圭東 일가이다.

울진인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은 이규동李圭東(혹 李圭四)과 최해崔海(혹 崔海日), 그리고 최경호崔京浩가 있다. 이 가운데 최해는 북로군정서의 교관으로 파견되어, 청산리전투에 기여하였다. 또한 곽무郭武는 부민단과 한족회 간부로 동포들을 이끌다 간도참변 때 순국하였다. 27결사대는 광무황제 국장일을 기하여 을사5적과 정미7적을 암살‧응징하고자 서간도에서 조직되었다. 이 결사대원 가운데 울진의 손창준孫昌俊‧ 주병웅朱秉雄이 있었다.

1919년에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매화에서 예정보다 하루 앞선 4월 10일에 시작돼, 11일 매화장날에 독립선언과 만세가 펼쳐졌고, 울진읍에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13일 북면 부구리 흥부장터에서도 예정대로 펼쳐졌다.

장식張植이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계기를 만들고, 옛날 만흥학교 출신이 앞장섰으며, 북면 고목리 전병겸田炳謙을 비롯한 감리교회 사람들, 청년 유림이 주력으로 참가하였다.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은 24명이다. 울진출신으로 서울에서 최익한崔益翰, 영해에서 한영육韓永育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전광순 광복회 울진지회장
안락웅 전몰군경유족회 울진지회장
김수현 상이군경회 울진지회장

서분점 전몰군경미망인회 울진지회장

 

 

 

 

 

 

1919년 8월 울진청년회가 조직되어 지‧덕‧체 교육을 주된 목적 사업으로 내걸고 나섰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우석李禹錫의 공이 컸다. 이 무렵 백정의 신분을 해방하자는 형평운동衡平運動도 일어났다. 울진에서도 1925년 형평사 울진지사(울진형평사)가 조직되었다. 울진청년회가 앞장선 형평운동은 자연스럽게 항일투쟁으로 연결되었다.

1926년 1월 울진청년회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사회주의 성향을 지닌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어낸 것이 울진청년동맹이다. 좌우세력이 연합하여 민족문제 해결에 나선다는 움직임은 서울에서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결성으로 열매를 맺었다. 울진지회는 그 해 12월에 조직되었다.

1920~30년대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울진인도 있었다. 장세용張世湧(혹張相徵‧張元濟)‧ 최해崔海(혹崔海日)‧ 전영경田永璟(혹田山海)‧ 이규동‧ 주진수가 바로 그들이다. 최해는 고려혁명군에서, 주진수와 전영경은 고려혁명당에서 활약하였다. 이규동은 정의부에서 활약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을 펼쳤고, 장세용은 조선혁명군 간부로 활약하였다. 또한 최익한은 일본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에 이르면 농촌사회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이 시기 민족해방운동으로는 울진공작당과 적색농민조합이 돋보이고, 비밀결사체로는 창유계暢幽契가 대표적이다. 이우정李愚貞과 중국에서 활동했던 윤두현尹斗鉉이 신간회의 사후 활동 방향을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나섰다. 윤두현이 1933년 3월 울진적색농민조합을 만들었다. 남왈성南曰星이 의장을 맡고, 진기열陳基烈이 편집부와 재정부를 책임졌다.

울진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가운데 전국적인 인물이라면 최익한이 대표적이다. 1897년 북면 나곡 2리 골마에서 태어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활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다니면서 1925년 일월회에 가입하여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시 귀국한 그는 제3차 조선공산당에 얽혀 구속되었다. 1934년에는 그의 아들 최재소崔在韶와 최학소崔學韶가 울진에서 대중투쟁을 펼치다가, 3부자가 한꺼번에 옥고를 치렀다. 최익한은 1936년 만기 출옥하였지만, 이듬해에 맏아들 재소가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하는 참극을 맞았다.

울진적색농민조합의 주축이던 남원수南源壽‧ 전원강田元江‧ 최학소 등이 1938년 2월에 준향계를 만들었다. 1939년 10월 창유계가 결성되는 바탕에는 준향계準香契가 있었다. 1943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된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모두 102명이 검거되고, 이 가운데 41명이 구속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울진에서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의병항쟁사에서 울진은 일찍부터 활발한 곳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조선공산당재건투쟁이라는 큰 구도 속에서 울진공작당이 등장하고, 울진적색농민조합의 투쟁, 창유계로 이어지는 사회운동이 역시 항일투쟁의 하나로 이어졌다.

군의 규모나 인구로 보아, 울진 사람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경상북도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결코 적지 않은 인물이 이곳 출신이다. 더구나 독립운동의 후반기에는 전국을 대표할만한 인물도 배출하였다.

★울진의 항일 운동사는 2011년 울진문화원에서 펴낸 ‘울진의 독립운동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외)’ 의 총론 편 참조했음


보훈 단체 현황(기준일 : 2015. 8. 1)

번호

단체명

대표자

사무실

소재지

설립일자

회원수

연락처

1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울진군지회장

김수현

울진읍 읍내로

57-6

‘51.05.15

189

(사무실) 782-4640

(팩 스) 782-4615

2

대한민국

전몰군경유족회

울진군지회장

안락웅

‘63.08.23

90

(사무실) 782-4640

(팩 스) 782-4615

3

대한민국

전몰군경미망인회

울진군지회장

서분점

160

(사무실) 782-4640

(팩 스) 782-4615

4

광복회

울진군지회장

전광순

울진읍 향교로

9-1

‘07.06.15

24

(사무실) 783-0301

(팩 스) 78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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