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룡 집필위원


              임명룡 집필위원
4년 전부터 치매를 앓아온 90세 노모(老母)가 어쩌다 넘어져 고관절 골절로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계신다.

병원 침상에 웅크린 체구가 하도 왜소해서 왜곡된 정신이나마 온전히 들어있을까 흔들어 깨우면, 정신을 추스르기도 바쁘게 알아듣기 힘든 울진 산골 사투리에다 가끔 짧은 욕설까지 섞어서, 지난했던 당신의 세월을 속사포로 펼친다.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그만하시라 입을 막을라치면 병실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말린다. 할머니 사투리가 너무 재미있단다. 그리고 묻는다. 할머니 고향이 어디세요? 혹시 백년손님에 나오는 남서방 장모님 동네 아니에요?

  이처럼 국민사위 남서방과 후포리 이춘자 할매는 어디에서나 유명인사다. 덕분에 울진 후포리가 매주 마다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 객지에 사는 사람으로서 여간 고맙게 여겨지는 게 아니다. 실제로 가까운 봉천동에 ‘후포리 횟집’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입구에는 남서방 내외분과 식당사장님이 함께 찍은 대형 브로마이드를 걸어 홍보 효과도 얻고 있다.

필자는 생선을 좋아하지 않아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가끔 들러 인상 좋은 후포 사장님과 고향 이야기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다보면, 손님들이 남서방과 이춘자 할매를 TV에서 잘 보고 있다며 먼저 인사를 건네 오기도 한다.

  TV에서 두 분이 나올 때면 시청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해맑아 보인다. 병실 사람들은 이춘자 할매와 어머니를 번갈아 봐가며 특이한 사투리에 신기해 한다.

어머니는 자신을 돌봐주는 간병인이 중국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는, 어렸을 때 만주로 떠난 사촌 여동생이 돌아와서 보살펴주는 줄로 안다. 자꾸만 “니는 우얘 한개도 안 늙었노?”한다.

어머니 고향은 울진에서도 오지(奧地) 마을인 온정면 조금리, 아들 없이 딸만 둘인 집안에서 둘째였다. 열세 살 더 많은 언니는 왜정 때 처녀공출을 피하느라 일찍 시집을 간 탓에 어머니의 유년시절 기억에 친언니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간병인 아주머니를 붙잡고 기억공유를 강요하며 어린 시절 추억을 주입시킨다.

얼마 전, 경기도 안양시 모 교회에 담임목사로 계신 재종숙(再從叔) 아재로부터 전화가 왔다. 교회 일로 중국 심양에 갔는데, 한국 사업가의 초대를 받고 식사를 나누다가 말투가 비슷해서 고향을 물었더니, 같은 울진이어서 무척 반가웠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사업가 분이 나의 이종사촌 형님이라는 것이다. 아재는 내게 이춘봉이라는 이종형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알긴 아는데 면목 없지만 워낙 나이차가 크고 일찍 객지로 나와 왕래가 없던 탓에 한 번도 뵌 적은 없다고 말씀드렸다.

아재는 그분께서 이모님께 전달해달라며 귀한 청심환까지 딸려 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짜로 놀랄 일은 따로 있다고 했다. SBS TV ‘백년손님’에 출연하는 후포 이춘자 여사를 아느냐고 한다. 텔레비전에서나 봤지 모르는 분이라 대답하는 순간, 머리에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이춘봉이라는 이름에서 짐작이 가듯, 이춘자 여사와 필자는 이종사촌 간이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열세 살 위 언니네 맏딸. 그렇다보니 어머니와 나이차도 별로 없는 맏조카. 그 조카가 출연하는 방송을 병실 사람들은 열심히 보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중국에서 돌아온 간병인 사촌(?)과 기억 찾기에만 열심일 뿐이다.

TV를 보던 병실 사람들이 가끔씩 어머니를 돌아본다. 이모와 조카 사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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