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중의 이런저런 이야기(32)


베네치아는 내가 여행 다닌 도시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물위에 도시가 건설되어 인간의 무한한 힘을 보았기 때문이다.

6세기 롬바르디아인들을 피해 온 난민들과 토착어민들이 아드리아 해의 석호 위에 세운 도시였다. 수백만 떡갈나무 말뚝을 바다 속 점토층에 깊숙이 박고, 진흙을 채워 건물을 올린 신비의 세계이다.

불굴의 의지와 상상력으로 일군 대역사는 참으로 경이롭다. 떡갈나무는 물속에서 돌이 되었는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베네치아를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 행 수상 버스를 탔다. 운하의 잔물결이 찰랑대며 반사하는 빛이 들어왔다. 여행객을 태워 온 크루즈선 여러 대가 정박해 있고 수상 보트와 하키, 곤돌라가 바다에 널려있었다.

나는 물위에 뜬 거대한 인공 도시를 보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곳이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비정상적이면서 정상적이었다. 너무나 달라서 달리 다른 곳과 비교될 수 없는 곳이었다. 눈앞은 현란하면서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무아 경지였다. 토마스만이 베네치아의 이미지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베네치아는 동방 무역의 주역으로 신문물을 빠르게 접수한 상인의 도시였다. 상인은 상대방의 종교나 문화를 묻지 않는다. 난민들에게 바다 너머 낯선 사람들의 거래와 공존은 생존본능의 결과였다. 개인숭배와 파당이 없는 철저한 공화제로 무역 강국의 기치를 세우고 해양강국으로 성장해갔다. 

마르코 폴로의 시절이던 13세기 베네치아는 유럽 최고의 부자도시였다. 10만 명 정도의 시민이 3300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3만 6,000명에 달하는 선원을 가지고 해외로 나아갔다. 이 선박은 필요시 전투할 수 있도록 무기를 싣고 다녔다.

베네치아 사람들의 진취적 기상은 동방을 진정 알았던 유일한 유럽인이었다. 동방견문록의 주인공 마르크폴로의 집안처럼 중국에만 간 것이 아니다. 카보토 형제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다모스토가 아프리카의 카포베르데에 이른 것들이 그러하다.

베네치아는 지극히 차분하고 평화롭고 고요한 경지다. 빛과 돌과 물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공기와 물안개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음악과 미술에 애정을 바치는 예술가의 도시오, 격정적인 만남을 꿈꾸는 몽상가들의 도시였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발디의 사계가 이곳에서 탄생되었는가. 사계는 활기찬 리듬과 감미로운 선율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18세기 최고의 바람둥이로 불리던 카사노바도 여기서 수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속삭였던가.

산마르코 광장은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슬라브족의 대유입이 있었고 기독교의 대분열도 있었다. 두 문화가 만난 곳이라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그래서 산 마르코는 서유럽 성당들과 외관이 다르다. 광장 한쪽에 서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은 동양의 비잔틴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서양의 로마네스크와 르네상스가 어우러진 유럽의 걸작 품이다.

약 천 년 전, 성인 마르코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대성당 입구 4두 청동마상과 베네치아 수호신이라는 날개 달린 사자상이 인상적이다. 대성당 옆엔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는 두칼레 궁전이, 건너편엔 종탑과 마르차나도서관이, 그 옆으로 상가들이 즐비하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고 극찬한 산 마르코 광장을 아내와 함께 걸었다. 광장 안에는 플로리안 카페와 헤르즈 바가 있다. 플로리안은 악사들의 연주가 있는 음악 카페로 지식인들이 모여 삶을 토론하고 예술의 영감을 키운 곳이었다. 괴테, 릴케, 바이런 등 많은 명사들이 찾았다. 헤르즈 바에도 헤밍웨이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즐겨 찾던 곳이라 한다. 아내와 커피 한잔을 나누고 싶었으나 빠듯한 일정으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상점 안에서 유리 공예품을 흥정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선착장에서 넘실대는 물결 건너편에 있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웅장함과 흰색 대리석이 손에 잡힐 듯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거리는 관광객 인파로 넘쳤다. 

베네치아는 물위에 세워진 도시이니, 오래전부터 농토가 없고 농토가 없으니 영지가 없었다. 차가 다닐 만한 넓은 길이 없으니 커다란 배가 버스가 되고 까만 곤돌라가 택시 역할을 한다. 그러니 베네치아에 도착해서 시내로 가려 하는 여행객은 누구나 수상 버스나 곤돌라를 탈 수밖에 없고, 그 뱃전에서 바라보면 풍경 되는 것이다.  

베네치아는 118개의 작은 섬과 177개의 운하를 400여개의 다리가 연결하고 있어 낭만전적인 풍경이다. 도로가 된 물길, 큰 물길 작은 물길이 사방으로 이어진다. 콘도라, 수상택시, 수상버스가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고 푸른 물 넘실대는 주택가 골목길 고양이 강아지 아이들이 뛰어다닐 자리에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돌아다닌다.

산 마르코 정류장에서 두 대의 수상택시에 14명씩 나누어 탔다. 산타루치아 역까지 가는 코스로 40분 소요되었다. 운하 옆으로 페기구겐하임미술관, 아카데미미술관을 거쳐 리알토다리를 지나면서 성당과 교회, 명사들이 살았던 저택이 즐비했다.

성악을 전공한 40대의 강씨 가이드는 목청을 뽑았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싼타루치아, 오솔레미오, 제비꽃의 노래가 이어졌다. 가이드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노래를 부르거나 많은 정보를 알려주려고 열정적으로 안내 했다. 한국에서 성악을 공부하러 이탈리아로 유학 왔다가 유능한 가이드가 되었다고 한다.

베네치아는 운하가 도로인 이곳에서 곤돌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뱃사공은 챙 모자를 쓰고 검은 바지에 줄무늬 티셔츠를 입었다. 곤돌라는 길이 10미터, 너비1.38미터의 휘어진 활모양이다. 검은색으로 통일했다고 한다. 3미터 길이의 노를 한쪽에서 젓기 때문에 약간 기울어져 나아간다. 뱃사공은 소정의 시험을 거쳐 면허증을 따고 허가증이 있어야 곤돌라를 운행할 수 있었다. 17세기 그 수가 일만 척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400대가 남아 관광객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 여섯 명이 탄 곤돌라는 좁은 수로를 따라 나아갔다. 수로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으나, 찾기 쉽도록 집 번지와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수로를 따라 탄식의 다리를 지나자 뱃사공이 들려주는 노래는 감미로웠다. 곤돌라는 춤추듯 흔들리며 박자를 맞춰주었다.

수상 주택가 주변엔 배를 정박 해 두는 떡갈나무 말뚝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 사이에 배를 대 두는 방식이다. 물에 맞닿은 부분은 이끼가 끼어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위에 조금씩 기울어진 건물도 더러 보였다. 

해마다 수십 차례 건물이 물에 잠긴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제일 큰 광장 산 마르코 광장까지도 최근 5년 전부터는 물난리를 치른단다. 지구온난화로 바다의 수위가 높아져 건물은 1년에 2밀리미터씩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래서 큰 건물도 우리 돈 1억 원이면 살 수 있다는 소문에 동행한 동갑 김 씨, 썩어서 기울어지는 집을 사서 무엇하리라며 고개를 흔든다. 

베네치아 만에는 여행객을 실은 곤돌라들만 한가롭다.

 

저작권자 © 울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